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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따 모스크바]공항 내리자마자 “원샷”

입력 | 2006-07-10 03:06:00


LG전자 모스크바지사에 근무하는 이모 부장이 탄 여객기가 시베리아 울란우데 공항에 착륙했다. 현지 시간 오전 8시. 그는 ‘전투준비’부터 했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액체 위장약을 꺼내 마셨다.

이 부장이 트랩을 내려오자 활주로까지 나온 현지 거래 회사의 안드레이 사장이 반갑게 맞았다. 민속 의상을 입은 여성이 다가와 목에 천을 둘러 주고는 딱딱한 빵과 소금을 내놓았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손님맞이. 이 부장은 빵을 조금 떼어 소금에 찍어 먹었다.

다음은 쟁반에 받친 보드카 잔이 나왔다. 옆에서 ‘다 드냐(잔 비우기)’를 외치는 안드레이 사장을 보며 잔을 단숨에 비웠다. 40도짜리 보드카가 아침도 안 먹은 빈속으로 들어가자 속이 짜릿해지면서 순식간에 취기가 돌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컵라면으로 간단히 요기를 한 이 부장은 거래 회사가 운영하는 상점을 방문했다. 시장 상황과 경쟁사 제품의 가격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입구에서 그를 맞은 것은 또 보드카 잔이었다. 이렇게 아침부터 몇 군데를 돌며 보드카를 5, 6잔 얻어 마시다 보니 머리기 띵하고 속도 따가웠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거래처 직원들이 내미는 술잔을 마다하기 어려웠다.

저녁에는 안드레이 사장이 초청한 만찬. 돌아가면서 간단한 인사말로 ‘토스트(건배)’를 제의했다. 그때마다 보드카 잔을 비웠다. 참석자들이 빠짐없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한 잔씩 하려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더구나 비운 술잔은 늘 다시 가득 채워졌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의 물처럼 가득 잔을 채우는 것이 이 지방의 풍습이라는 것.

결국 2박 3일의 출장 일정은 보드카로 시작해서 보드카로 끝났다. 1990년대 초부터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옛 소련 지역에서 근무해 온 그는 지금까지 마신 보드카만 1t이 넘을 거라며 웃었다.

본사에는 이런 얘기를 꺼내지도 못한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술 마시며 비즈니스를 하느냐”는 핀잔만 들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 시장에서 LG전자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한국 기업이 선전하는 데는 말술도 피하지 않는 적극적인 태도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직도 정확한 거래 조건보다는 인간관계와 신뢰를 중시하는 러시아의 비즈니스 관행에서 보드카는 빼놓을 수 없다. 예전 러시아 모피 상인들이 보드카를 마시며 거래를 했을 정도로 역사도 오래됐다.

최근에는 비즈니스 관행이 서구화되면서 보드카를 권하지 않는 젊은 러시아 기업인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긴 하다.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