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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804년 해밀턴-버 권총 결투

입력 | 2006-07-11 03:00:00


1804년 7월 11일 아침 7시 미국 뉴저지 주 위호켄 외곽의 허드슨 강변 바위절벽 아래.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과 현직 부통령(3대) 애런 버가 권총에 실탄을 장전한 뒤 각자 위치에 섰다.

해밀턴의 친구 한 사람이 물었다. “자, 준비됐나?” 두 사람은 그렇다고 답했고, 친구는 발사 신호를 내렸다. 두 발의 총성이 잇따라 새벽 공기를 갈랐다.

버는 그대로 서 있었다. 해밀턴은 발끝으로 일어서다 다시 쓰러졌다. 해밀턴을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본 버는 곧바로 그 자리를 떴다.

총알은 해밀턴의 오른쪽 골반 위쪽 간을 뚫고 척추에 박혔다. 미국 경제의 기본 틀을 마련해 10달러 지폐에 얼굴이 들어 있는 해밀턴은 다음 날 숨졌다. 그의 죽음을 가져온 세기의 결투(duel)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해밀턴은 숨을 거두기 전 “일부러 공중에 쏘았다”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이론이 분분하지만 장남 필립이 3년 전 똑같은 장소에서 권총 결투를 벌여 숨지는 비운을 겪은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나중에 이런 해밀턴의 얘기를 전해들은 버의 반응은 싸늘했다. “사실이라면 경멸할 일이다.”

당시까지도 결투는 ‘명예 사건(affair of honor)’이라고 불렸고 엄격한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모욕을 당한 중세 기사들은 상대의 뺨을 장갑으로 때리거나 그 앞에 장갑을 떨어뜨려 결투를 신청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명예로 간주됐다.

결투는 사전에 장소, 무기, 방식을 철저히 합의한 뒤 이뤄졌다. 그 한계도 ▽처음 피를 볼 때까지 ▽중상을 입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등 다양하게 정해졌다. 권총 결투의 경우 한 발씩 쏘는 게 일반적이었고 둘 사이의 거리는 모욕이 클수록 가까웠다.

버가 결투를 신청한 이유는 “해밀턴이 버에 대해 더 야비한 의견(more despicable opinion)을 피력했다”는 신문 기사 때문이었다. 버는 해명을 요구했지만 평소 공사석에서 오랜 정적(政敵) 버의 인간성을 비난해 온 해밀턴으로선 답변을 할 수 없었던 것.

당시 뉴욕에선 법으로 결투가 금지돼 있었다. 이 때문에 결투 장소를 허드슨 강 건너 뉴저지로 정한 것이었지만 버는 살인죄로 기소돼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재판은 열리지 않았고 버는 다음 해 부통령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