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지리산 벽송사를 다녀왔다. 도반 스님이 하안거(夏安居)로 수행하고 있는 선원(禪院)에 대중공양을 올린다는 핑계로 잠시 소란을 피웠다. 오랜만에 도시를 떠나 천년 숲의 산사를 오르는 기분은 참으로 상쾌하고 심신의 피로도 풀리는 듯했다.
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고찰을 찾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혹시나 정진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조용히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속세의 때를 두고나 오지 않을지 걱정이 앞선다. 같은 스님인데도 이와 같이 조심스러운데 하물며 재가자들이야 얼마나 망설여지겠는가.
그런데 반가운 소식은 천년 고찰들이 세속인들을 위해 오랜 빗장을 풀고 흔쾌히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여름은 사찰마다 선원에서 하안거로 수행에 전념하는 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일반인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산사를 체험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을 돌이켜 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프로그램은 사찰에 따라서 단기출가, 산사체험, 산사의 생활, 불교문화체험, 어린이 불교학교 등 다양하다.
참가하는 사람들 중에는 불교 신자도 많지만 믿는 종교가 없는 분이나 다른 종교의 신자도 부담 없이 오고 있다. 또한 직장인들이 휴가를 내고, 도시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자 하며, 가족단위 또는 친구가 함께 참여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외국인도 있다.
사연은 다양하지만 며칠을 함께 생활하다 보면, 오로지 자아(自我)를 찾아 떠나 깊은 산속으로 빠져드는 심마니와도 같아진다.
새벽 정적을 깨는 목탁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법고와 범종, 운판, 목어의 울림이 끝나면 많은 스님이 합창하는 예불의 장엄함이란 어떠한 오케스트라에 못지않다. 오래전에 신임 교수들과 함께 해인사로 수련회를 간 일이 있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교수들이 처음으로 체험해 본 산사의 생활은 그대로 황홀경이었다고들 하였다.
특히 해인사의 새벽 예불은 홍유동 맑은 물에 세수하고 큰 법당에 앉으면 가야산 곳곳의 암자에서 울리는 법고와 범종소리, 스님 100여 명의 예불소리는 그대로 극락정토의 화음이었다.
바루공양은 불가의 식사예법으로 쌀 한 톨, 물 한 방울도 아끼며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한다. 스님들과 함께하는 차 한 잔과 원시림을 걷는 산행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한다. 맑은 냇가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바위에 걸터앉아 반가부좌를 틀기도 한다. 매미소리, 새소리, 물소리 속에서 고요히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화두를 잡고 시름을 하며, 저려오는 다리를 위로하기 위해 콧등에 침을 바르기도 한다.
오후 시간은 참회도 하고, 강의도 들으며, 선정에 들기도 한다. 저녁 예불에는 직접 범종도 쳐 보고, 법고도 두드려 보며, 발원문을 써 손수 만든 연등에 불을 밝히고 나와 인연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취침 전에 혹시 내가 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유언장을 작성하여 머리맡에 두고 잠자리에 든다. 이 시간이 가장 숙연해질 때이며, 유언장을 쓰고 자는 잠자리가 참으로 소중한 하루가 아닐 수 없다.
산사체험 프로그램은 스님들의 일과를 그대로 경험해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의 의식주 생활이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수련복으로 마련된 개량 한복으로 갈아입고, 우리 전통의 먹을거리를 맛보며 기와집 온돌방에서 하는 생활 체험은 참으로 소중하다.
올여름에는 산사에서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권해 보고 싶다.
한보광 동국대 교수 청계산 정토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