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은 희미해진 채 모든 것이 개인에게 귀착되는 21세기, 컴퓨터 하나만으로 모든 궁금증을 손쉽게 해결하는 인터넷 시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인간이 어떤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 심성의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이 서로 교류하지 못하고 차단되어 있다. 이것이 내가 온달을 불러내고, 다시 주목하는 이유였다. 까마득한 옛날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확신을 제시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온달, 바보가 된 고구려 귀족’은 흥미롭고 정직한 역사서다. 역사학자의 자문을 구해 가며 소설가가 쓴 역사서이기 때문일까? 그 결론도 온달 역사의 복원과 함께 ‘역사 의미 찾기’에 비중을 두고 있다. 국가 민족 계급 등 거대 담론에 밀려 소외됐던, 설화화한 개인 역사에 담긴 의미 찾기로 역사학의 지평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소설가인 저자가 역사학자와 향토사학자의 자문을 구하며 전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돼 이채롭다. 역사 찾기 방법도 신선하다. 먼저 온달설화를 통해 굳어진 기존 온달상(바보·하층신분·부인 도움으로 출세한 남자)을 해체한다. 그리고 온달을 역사학에서는 실재인물로, 국문학에서는 설화 속 인물로 접근하고 있다는 차이를 발견한다. 이 책은 양자의 주장을 모두 수용하고 ‘하나의 가정만으로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역사학자의 충고를 따른다. 그러면서도 온달의 실재성과 온달 설화의 ‘그 어떤 의미’ 사이에서 고민한다.
이어 역사의 현장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전설은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의 애정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과 관련된 장소 또는 물건에 붙은 이야기’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온달 설화도 마찬가지임을 알게 된 저자는 온달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한다.
조선 시대 통치계급은 온달을 ‘충과 의를 가진 인물’로, 서민들은 ‘따뜻한 애정을 가진 사람내 나는 인물’로, 북한에서는 억압받던 평민 출신의 ‘나라와 인민을 구한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저자는 특유의 끈기로 온달 관련 자료에서 설화적 부분과 역사적 사실을 구분해 낸다. 역사와 설화, 즉 ‘사실’과 ‘의미 찾기’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이런 실증 작업을 거쳐 이 책에선 온달의 신분을 고구려 신흥귀족으로 추정한다. 온달은 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했고, 6세기 말 고구려의 꿈을 실현시켜 줄 영웅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런 온달이 바보로 인식된 배경에 대해 이 책은 바보의 친근한 이미지와 관련지어 의미 찾기를 시도한다. 즉 바보 신드롬의 이면에는 ‘입으로 정의를 외치며 뒤에서 편법과 불의를 자행했던 기성 세대의 꾀보 행위를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또 머리 좋고 집안 화려하고 학벌 좋은 세칭 일류의 허울을 벗기고 싶은 이들의 소망이 투영’된 무의식의 발로가 있었다는 평가를 놓치지 않는다. ‘온달은 바보가 아니라 바보로 만들어졌다’는, 즉 역사에 대한 변명이다.
요즘 지상파 방송사들은 역사 인물들을 무비판적으로 영웅화한 드라마를 앞다투어 방영하고 있다. 극적 재미를 위해 허구가 일정 부분 가미될 수밖에 없지만 시청률을 의식해 역사를 바닥부터 헤집는 작업은 결과적으로 역사허무주의를 초래할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이 책은 실증성과 역사의 의미를 균형있게 추구한 대중 역사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재범 경기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