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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오명철]장모가 남긴 마지막 선물

입력 | 2006-07-13 03:00:00


지난달 장모님을 경기 파주시 금촌동 기독공원묘지에 모시고 돌아오면서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79세를 일기로 작고하신 장모는 27년 앞서 세상을 떠난 남편 박항섭(朴恒燮·1923∼1979) 화백 곁에 누우셨다. 오래전 남편의 묘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두셨을 정도로 사랑했던 터였다.

장모는 5대째 기독교 가정의 믿음을 이어 오셨고, 일제강점기에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이셨다. 장인어른 생시에는 남편의 화업(畵業)을 뒷바라지하는 데 온갖 정성을 다했고, 1979년 남편이 갑작스럽게 별세하자 혼자 힘으로 자녀들을 교육하고 성가(成家)시킨 ‘강인한 믿음의 어머니’였다. ‘화가의 연인은 로맨틱하지만, 화가의 아내는 위대하다’는 말은 장모 같은 분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장모는 당초 막내 사윗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첫째 사위가 진보 교단의 목사, 둘째 사위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군인인데 셋째 사윗감이 거칠기 짝이 없는 기자라는 사실이 못마땅하셨던 것이다. 게다가 그 기자는 ‘홀어머니를 모시는 가난한 집의 장남’이었다. 그래서 약혼식도 못 하게 하시고, 결혼 날짜도 추석 전날로 잡으셨다. 사위는 묵묵히 장모의 말씀을 따랐다. 1·4후퇴 때 황해도 장연에서 월남하신 장모는 늘 사위들의 ‘직업적 특수성’을 염려하시곤 했다.

장모의 걱정과 오해를 푸는 지름길은 잘해 드리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사위는 결혼 후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장모에게 문안 전화를 드렸다. 부부싸움 끝에 가출을 감행할 때면 무조건 처가로 달려갔다. 한 달여 동안 처가에서 지낸 적도 있다. 아내를 향해 “못마땅하지만 갈라설 생각은 없으며, ‘안전’한 곳에 있다”는 무언(無言)의 시위였다. 처남이 장가들기 전에는 홀어머니와 장모를 함께 모시고 휴가를 떠나곤 했고 사돈끼리 해외여행을 다녀오시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아내가 시댁에 소홀하게 하는 것은 섭섭하지 않았으나 친정에 소홀하게 하는 것은 야속했다.

장모와 사위는 아들과 딸들도 알지 못하는 고통을 함께 나눴다. 장모가 억대의 사기를 당했을 때 사위는 사흘간 사기범을 잡으러 쫓아다녔고, 이 사람 저 사람 이름을 빌려 신용대출로 급전을 마련하느라 탈진하기도 했다. 겨울이면 보일러를 제대로 켜지 않고 지내시는 것이 마음에 걸려 유조차를 불러 기름을 가득 채워 드리고 오기도 했다. 장모가 어쩌다 해외여행을 가실 때면 무리를 해서라도 여비를 보태 드렸다. “내가 처가에 하는 것의 반의 반만큼만 아내가 시댁에 해도 다행”이라는 것이 사위의 생각이었다. 처남과 처형이 장모에게 섭섭하게 하면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

장모도 막내 사위를 끔찍이 사랑했다. 사위가 생애 처음으로 제 집을 마련하면서 막판 입주금 마련에 애를 쓰자 장모는 깊숙이 간직해 온 장인어른의 그림 두 점을 내어 주며 “팔아서 보태 쓰라”고 하셨다. 장모가 장인의 그림을 목숨처럼 간수해 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사위는 “그럴 수는 없다”며 받지 않았다. 훗날 장모는 “후손들이 할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그림 두 점을 선물로 주셨다. 사위는 몇 해 전부터 아내의 생일날에 장모에게도 꽃다발을 보내 드렸고 장모는 무척 기뻐하셨다.

장모가 사위를 위해 베푼 가장 큰 사랑은 기도와 임종(臨終)에의 초대였다. 장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해외 출장을 떠난 사위를 기다리다 그가 병실에 도착해 손을 꼭 잡아 드리자 마지막으로 두 눈을 크게 뜬 뒤 세상을 떠나셨다. 사위는 장모의 귀에 대고 “어머니, 정말 수고 많이 하셨어요. 이제 맘 편히 장인어른 계신 곳으로 가셔요”라며 울먹였다. 장모는 1남 3녀와 6명의 손자 손녀, 그리고 막내 사위가 부르는 찬송가 소리를 들으며 평화롭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사위는 장모의 영정 앞에서 40대 후반에 고아가 된 아내를 이제부터 딸처럼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