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무덥다. TV를 봐도 신문을 봐도 온통 슬프고 어두운 소식뿐, 어디 한 군데 상큼한 구석이 없고 기분도 날씨처럼 칙칙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오후에 어느 대학신문에서 전화가 걸려 와 나의 ‘행복론’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한다. 무슨 번지수 틀린 소리인지. 불쾌지수가 99쯤 되는 날씨에 웬 ‘행복’ 운운하는가 말이다. 대답이 군색하여 하루쯤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고, 학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신촌 로터리로 들어서는데 차의 휘발유가 바닥나서 자꾸 노란 경고등이 들어오고 있었다. 휘발유 넣는 일조차 번거로워 게으름을 피운 탓이다. 부랴부랴 학교 근처의 주유소로 들어갔다. 3만 원 이상 주유하면 커피와 자질구레한 선물을 주기 때문에 내가 자주 드나드는 주유소다. 스무 살쯤 된 낯익은 젊은 청년이 달려왔다. “얼마나 넣어요?” 뭐가 그리 좋은지 더운 날씨에 밖에서 일하느라 셔츠가 땀에 흠뻑 젖었는데도 얼굴은 함박웃음이다. “가득요.” 퉁명스럽게 말하자 청년은 재빨리 호스를 연결해 놓고는 다시 물었다. “냉커피 드려요, 따뜻한 커피 드려요?”
“아니, 이 더운데 뜨거운 커피를 어떻게 마셔요?”
내가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청년은 얼른 뛰어가서 냉커피 한 잔을 들고 왔다. 내 기분이 찌뿌드드한 걸 눈치 챘는지 커피를 내밀며 청년이 말했다. “얼음을 곱빼기로 넣었어요. 근데 아줌마, 우리 집 커피 참 맛있죠?”
예기치 않은 질문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충 얼버무리고 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내심 생각했다. “별일이네. ‘우리 집’이라니, 저 큰 주유소가 자기 거라도 되나?”
회의를 끝내고 집에 돌아올 즈음에는 이미 러시아워가 시작되어 차가 꽉 막혀 있었다. 빨간 불에 선 차들이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인도 쪽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긴 뻥튀기를 팔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차에서 내리는 수고를 아끼기 위해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다. “할아버지! 뻥튀기 한 바가지에 얼마예요?” 거리가 기껏해야 3m 정도였는데 할아버지는 내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할아버지!” 나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바로 그때 횡단보도를 건너던 어떤 여학생이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더니 급히 할아버지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나를 가리키며 무언가 손짓을 하고는 내게 와서 말했다. “아줌마, 두 바가지에 1000원이래요, 얼마나 드려요?” 방글방글 웃는 얼굴에 보조개가 인상적이었다.
그제야 나는 할아버지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여학생은 초라하게 서 있는 할아버지가 안돼 보여 뻥튀기 한 바가지라도 더 팔게 도와주기 위해 오던 길을 되돌아간 것이었다.
집에 오는 길 내내 나는 생각했다. 나와는 달리, 이 무더운 날씨에 아까 주유소 젊은이와 그 여학생의 얼굴은 무척 밝고 행복해 보였다고.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이란 글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선(善)을 행하는 일이다”라고 답하고 있다. 즉 바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삶이 더욱 풍부해지고 내가 행복해지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론에 따르면 아까 그 두 젊은이의 얼굴이 그렇게 환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저녁때 대학신문 기자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는 할 말이 있을 법했다.
“톨스토이의 행복이론을 한번 시험해 보려고 합니다. 무더위에 짜증이 나도, 사는 게 별로 재미없어도, 옆 사람에게 좋게 대하면 정말 나까지 행복해지는지….”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