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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서정신]황실열풍, 그 빛과 그림자

입력 | 2006-07-19 03:04:00


몇 달 전 ‘궁’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분단되지 않은 한반도에 부활된 입헌군주제. 국민의 사랑을 받는 황제와 잘생긴 세자. 그리고 천방지축 귀여운 세자빈. 만화에서 콘텐츠를 빌려 온 그 드라마는 줄거리보다도 화려한 고화질 영상으로 화제가 됐다.

그런데 그 드라마도 끝난 지금,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관심과 환상이 계속되고 있어 ‘황실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런 관측의 이면에는 놀라움이 숨겨져 있다.

황실에 대한 관심의 진원지는 당연히 갓 쓴 연세 지긋한 유학자들일 것 같은데 청바지와 미니스커트로 무장한 젊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누구인가?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조선왕조 500년의 정치철학에는 관심도 없고 군사부일체보다는 ‘두사부일체’가 더 귀에 익은 젊고 발랄한 세대가 아닌가? 그런데 이들이, 아무리 소수이긴 해도, 왜 이런 생뚱맞은 태도를 보이는가?

하지만 젊은 세대의 이런 태도가 꼭 놀랍지만은 않은 면도 있다. 월드컵 응원에 나선 젊은이들의 복장에는 태극기 두건만이 아니라 태극기 브래지어도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국가와 애국심은 경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흔들고 휘감고 입을 수 있는 애정의 대상일 뿐이다. 비장한 충성심의 애국가가 아니라 온몸을 흔들며 부르는 ‘윤뺀(윤도현 밴드)’식 애국가가 그들의 애국가다. 월드컵에서 시원한 한 골을 선사해 준 이천수 박지성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조국을 사랑한다. 정말 멋있다고 환호하면서.

정치인에 대한 감수성도 마찬가지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신선해 보이니까 오세훈 후보가 좋다는 식의 발상에는 영상이미지, 인터넷 정보화, 그리고 글로벌 여행의 시대를 살아온 젊은이들의 문화코드가 숨어 있다.

식민사관을 외우던 조부모 세대나 민중사관을 공부하던 부모 세대와 달리 이들은 질곡의 역사보다 열등감 없는 과거 모습을 사랑한다. 드라마 ‘대장금’, ‘상도’, ‘다모’의 주인공처럼 당당하게 살아온 역사적 인물의 모습을 선택하고 싶은 역사적 과거라고 치부한다. ‘하오체’로 채팅을 하며 밤을 새우던 ‘다모 폐인’들은 디지털카메라 시대와 조선시대를 그럴듯하게 연결하며 살아가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대한제국의 황태자비가 등장하는 만화와 드라마가 멋져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대한민국은 왜 다이애나비와 윌리엄 왕자가 있는 영국처럼 화려해 보이면 안 된단 말인가? 일본에 착취당하던 식민지 한반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처녀들을 회상하기보다는 가수 에릭처럼 멋진 미남인 고종의 손자 이우 씨가 금장식 예복을 입고 살던 그 대한제국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더 멋지지 않은가?

‘노블레스’ 같은 소위 상류층 멤버십 잡지가 씀씀이가 큰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사고가 유연해야 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명품을 따지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은 현실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그런 분위기에 물들어서, 태어나자마자 최상류층이 되어 최고로 화려한 생활을 하는 황실 집단이 있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감출 수 없다.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데렐라 공주의 황금마차를 멀리서나마 보고 싶어 한다. 그러기에 재벌 2세와 결혼한 탤런트의 결혼이 동화 속의 삶이기를 바라고, 대통령과 그 아들딸들은 공주나 왕자 같은 연애결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프라하의 연인’도 그런 심리의 한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름다운 허구일 뿐이다.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나라를 넘겨야 했던, 마치 침몰하는 배와 같았던 대한제국에 대한 환상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서정신 문화평론가 스프링 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