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 상황에 홀연히 나타나 많은 사람을 구해 주는 슈퍼맨. 미국 영화 ‘슈퍼맨’은 1930년대에 처음 만들어져 대박을 터뜨린 당대의 블록버스터였다. 대공황의 여파로 실의에 잠긴 미국인들은 만화 주인공 같은 초인(超人)을 갈구했다. 픽션 영화의 허무맹랑한 슈퍼 영웅이지만 절망과 좌절에 빠진 미국인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1970년대 미국 침체기에 영화 슈퍼맨은 또 한번 부활한다. 크리스토퍼 리브 주연에 말런 브랜도, 진 해크먼 등이 조연한 리메이크작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베트남전쟁에서 패하고 무기력증에 빠진 미국인들이 자신들을 위로해 줄 슈퍼맨을 갈망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로 상징되는 경제 회복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의 슈퍼맨 붐은 가라앉는다. 우주왕복선을 날리는 미국은 슈퍼맨 따위를 날릴 필요가 없어진 듯했다.
▷한국판 슈퍼맨들의 활약이 화제다. 15일 강원 인제군 북면의 한 마을에서 ‘산악인 8명’이 물난리에 휩싸인 주민 5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물살을 피해 지붕에 올라가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안전지대로 옮긴 것이다. 주민들이 로프를 타고 구조되자마자 수마(水魔)에 휩쓸려 떠내려간 건물도 있었다. 해외 등반을 위해 훈련 중이던 산악인들이 슈퍼맨이 된 것이다. 이들은 타고 간 차가 모두 떠내려가 버스 편으로 서울로 향했다. 슈퍼맨들은 답례마저 뿌리친 채 훌훌 떠났다고 한다. 영화의 라스트 신 같다.
▷요즘 미국에서 ‘수퍼맨 리턴즈’가 만들어져 갈채를 받고 있다. 21세기에 다시 ‘초인’이 돌아온 배경에는 9·11테러 이후의 위기의식, 이라크전쟁 장기화에 따른 피로감, 경제 사회적인 침체 등이 깔려 있다고 한다. 안보와 경제 사정으로 불안하고 공허해진 한국인들에게도 산악인 슈퍼맨의 출현은 위안이 된다. 그들은 픽션 속이 아니라 절박한 수해 현장에서 애타게 손짓하는 주민들을 건져 냈다.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멋진 망토를 걸치지도 않았지만 진짜 영웅이다. 세트 장치도, 재연(再演)도 없는 목숨을 건 드라마이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