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해스터트 미국 하원의장(앞줄 오른쪽)이 5월 8일 의회에서 테러방지법 수정안에 서명하고 있다. 미국은 이 수정안에 따라 셔먼법(반트러스트법)을 위반하는 테러 조직과의 통상과 거래를 규제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미국에서 경쟁업체 직원과는 전화 통화하는 것도 조심하라.”
올해 3월 9일 발효된 미국의 테러방지법 수정안 때문에 국내 수출 대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수정안에 반독점법 위반 혐의 사안도 ‘테러 행위’와 똑같이 감청 대상으로 포함됐기 때문이다.
▽국내 수출기업에 어떤 영향 미칠까=반도체와 항공운송 분야 등에서 미국 시장에 진출해 있는 국내 대기업들은 미 행정부로부터 가격 담합 같은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거의 상시적인 감시 대상에 올라 있다.
여기에 테러방지법 수정안 113항에 따라 감청까지 허용돼 미국 현지에서 이들 기업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우려가 있다.
수정안은 미 수사기관의 감청을 ‘반독점법 위반 행위를 했다는 의심이 가거나 제보가 있을 때’에 한해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인 감청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반독점법 위반 행위가 테러 행위나 마찬가지로 규정됐기 때문.
이전까지는 미 연방수사국이나 중앙정보국이 감청 과정에서 반독점법 위반 혐의를 포착하더라도 ‘불법으로 수집된 증거는 수사나 재판에 활용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이를 근거로 수사에 나서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 자료를 법무부에 넘겨 수사에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현지에서 경쟁업체 직원과 전화 통화를 하거나 e메일을 교환할 경우 그 내용이 고스란히 미 수사기관의 수중에 흘러들어간다는 얘기다.
특히 미 행정부는 이 수정안을 근거로 미국 시장 점유율이 높은 한국 등 아시아 대기업을 표적으로 삼을 가능성이 짙다.
가뜩이나 국내 대기업에 대한 미 행정부의 반독점법 위반 혐의 기소 사례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수정안은 이를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그린버그 트라우리그 로펌의 반독점법 사건 전문가인 세실 정 변호사는 “미국에서는 반독점법 위반 행위의 개념을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어 한국에서는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기업들의 통상적인 정보 수집 활동도 미국의 기준으로는 반독점법 위반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는 일상적인 기업 활동으로 생각한 행동이 미 수사기관의 감청에 걸려 ‘테러 범죄’로 취급될 수도 있다는 것.
▽국내에선 법 개정 사실도 몰라=올해 3월 미 의회에서 수정안이 통과되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서명한 것에 대해 미 인권단체들은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113항의 반독점법 위반 행위 부분은 외국 기업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는 점 때문인지 미국 내에서 전혀 이슈화되지 않았다. 그런 탓에 국내에서 수정안 113항에 대해 알고 있는 곳은 극소수의 대기업뿐이었다.
이 극소수 대기업에서는 미 정부의 감청 실태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고 있어 항상 감청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업무를 해 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업은 현지 직원들에게 사전 교육은 물론 충분한 정보조차 없는 실정이다.
모 대기업 관계자는 “수정안이 감청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는 기업에는 큰 위협이 아니겠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에는 재앙이 될 수 있다”며 “잘못 걸리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앞으로 미국과 유럽에 진출해 있는 국내 기업들은 반독점법 교육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며 “전화나 e메일을 사용할 때 반독점법에 걸릴 소지가 있는 것을 유형별로 정리해 현지 직원을 대상으로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 테러방지법 수정안은
문제가 된 항목은 미국 테러방지법(PATRIOT Act) 수정안의 제113항에 언급돼 있다. 테러방지법에 준용되는 미국 연방법률 제18장(형사소송법)의 2516조 1항에 (r)호를 신설한 것이다.
이는 테러방지법을 적용해 감청할 수 있는 대상에 ‘ 반독점법(Sherman Act·셔먼법)의 1, 2, 3항을 위반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셔먼법은 국제거래에서의 독점 및 거래 제한을 금지하기 위한 일명 ‘반트러스트법’. 1항은 통상과 무역에서의 불법 규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2항은 통상과 무역관계에서의 불법적인 독점, 3항은 워싱턴 DC 내에서의 통상, 무역을 불법 규제하는 행위에 대한 것이다.
즉, 이 3개 조항에서 언급된 불법적인 경제활동과 독점을 일종의 테러로 규정해 테러방지법으로 다스리겠다는 것이 신설 조항의 핵심이다.
테러방지법 수정안은 이 밖에도 테러활동을 위한 자금지원 처벌 강화, 도로나 철도 같은 대중교통 시스템 공격에 대한 처벌 강화, 마약류인 메탐페타민 제조에 쓰일 수 있는 재료의 대량 구입 규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내용들이 백악관의 보도자료와 브리핑을 통해 자세하게 공개된 것과는 달리 셔먼법 관련 부분은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올해 3월 9일 의회를 통과한 수정안에 서명하면서 “이 개정안은 국제적인 테러의 위협을 막아내고 국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정부의 힘을 강화해 줄 것”이라고 밝혔다.
:애국법:
국내에 ‘애국법’으로 소개된 PATRIOT법은 ‘Providing Appropriate Tools Required to Intercept and Obstruct Terrorism Act’의 약자로 첫 글자만 따서 쓴 것. ‘테러를 사전에 차단하고 방지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법’이라는 뜻이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