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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정인영 한라건설 명예회장

입력 | 2006-07-21 03:00:00

정몽준 의원 헌화20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정인영 한라건설 명예회장의 빈소에서 고인의 조카인 정몽준 의원이 숙연한 표정으로 헌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20일 별세한 정인영 한라건설 명예회장은 ‘재계의 부도옹(不倒翁·오뚝이)’으로 불렸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에 1980년 기업을 빼앗겼고 1989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등 시련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 기업을 일으키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 줬기 때문이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형과는 때로 협력하고 때로 불화(不和)를 빚기도 했던 그가 세상을 떠남에 따라 ‘영(永)’자 항렬을 가진 현대가(家) 창업 1세대는 동생인 정희영(81) 여사와 정상영(70) KCC 명예회장만 남게 됐다.

○ ‘세계 속의 현대건설’로 육성

1920년 강원 통천군 송전면 아산마을에서 6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난 정 명예회장은 14세 때 서울로 상경했으며 고학으로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대 영문과에서 2년간 유학한 뒤 귀국해 동아일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언론인의 길을 걷던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6·25전쟁이었다. 형인 정주영 현대 창업주와 함께 부산 피란길에 올랐다가 형이 세운 현대건설에 참여했다.

그가 전쟁 중 미군부대 통역으로 일한 인연으로 현대건설은 미군 발주 공사를 도맡았으며 이를 통해 현대건설은 선두 건설업체로 발돋움할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1961년부터 15년간 현대건설 사장을 맡으면서 해외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세계 속의 현대건설’을 이뤄냈다.

현대건설 사장에서 물러난 뒤로는 1962년 세워진 현대양행을 따로 맡아 독자적으로 사업을 벌였다.

1980년 ‘서울의 봄’에 이어 찾아온 신군부의 집권은 ‘기업인 정인영’에게 찾아온 첫 번째 시련이었다. 산업합리화 조치에 따라 현대양행 창원종합기계공장(현 두산중공업)을 정부에 내줘야 했던 것.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만도기계를 국내 굴지의 자동차 부품업체로 키우며 재기에 성공했다.

○ 오뚝이같이 끝없는 도전의 인생

69세의 나이에 찾아온 뇌중풍은 그에게 두 번째 큰 시련이었다. 그러나 ‘재기가 힘들 것’이라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휠체어를 탄 채 경영에 복귀했다.

이후 과감한 ‘불도저 경영’으로 1996년 한라그룹을 자산 6조2000억 원의 재계 12위 그룹으로 키웠다.

세 번째 시련은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상호출자로 얽혀 있던 그룹이 부도를 맞자 정 명예회장은 대부분의 계열사를 매각하며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는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신이 살던 집까지 팔아치웠다.

한국 경제와 영욕(榮辱)을 같이했던 현대가 1세대는 2001년 정주영 창업주, 2005년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 이번에 정인영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한편 20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고인의 동생인 정희영 정상영 씨를 비롯해 정몽준 의원, 정몽선 현대시멘트·성우종합건설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 이사회 의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 정지선 현대백화점 부회장 등 정씨 일가가 모여 고인을 추모했다.

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리처드 웨커 외환은행장 등은 조화를 보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김유영 기자 ab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