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9일 남측의 쌀 지원 중단을 이유로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주의적 문제에 대한 논의를 전면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북한의 식량사정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북한경제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의 연간 식량소요량은 650만 t이지만 자체 생산량은 450만 t에 불과해 매년 200만 t가량의 식량 부족을 겪고 있다.
▽최대 곡창 황해남도 큰 피해=올해 북한의 식량 사정은 예년에 비해 악화될 전망이다. 일단 매년 20만∼30만 t의 식량을 지원해 오던 세계식량계획(WFP)의 대북 지원이 올해는 15만 t으로 줄었다. 게다가 미국은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 등의 위협을 이유로 대북 식량 지원을 사실상 중단한 상태이며 일본도 납치문제 등으로 지원을 중단했다.
매년 50만 t의 쌀을 정기적으로 지원했던 남측도 13일 결렬된 제19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미사일 문제의 출구가 마련되기 전까지는 쌀을 지원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19일 이산가족 상봉 중단 등 강수를 두며 압박의 수위를 높였지만 정부도 입장을 번복하기는 쉽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잇따른 태풍과 장마로 북한의 최대 곡창지역인 황해남도가 큰 피해를 봐 식량 생산량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동북아경제협력센터 연구위원은 “지난해 북한이 세계식량기구의 식량 지원 감시 강화방침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예년과 달리 국제기구나 국제민간단체의 식량 지원이 크게 줄어든 상태”라고 말했다.
▽대규모 식량난 재연되나=결국 남측이 쌀 지원 중단을 번복하지 않으면 식량 재고가 바닥나는 8∼9월부터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더욱이 남측은 WFP를 통해 북측에서 대체식량의 역할을 하는 옥수수도 10만 t 이상을 지원해 왔다. 북한 식량부족분의 20∼30%를 남측이 메워 주고 있는 셈이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도 장관급회담에 앞선 11일 언론사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7월 말에 쌀을 받기를 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훈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국제농업연구센터 북한팀장은 “현재 봄 수확 작물로 버티고 있는 북한 당국이 보유한 쌀 비축분이 거의 바닥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측은 미사일 발사로 인한 국제정세의 불안 속에서도 남측의 식량지원을 이끌어 내기 위해 19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참여해 8·15행사에 당국대표단의 파견 등을 이례적으로 먼저 제안했지만 남측으로부터 거절당했다.
북측이 회담 조기 종결을 선언한 것이나 이산가족 상봉을 일방적으로 중단하자고 주장한 것이 정치적 압박이 아니라 식량지원 재개를 위한 절박한 요청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고려대 북한학과 유호열 교수는 “당장은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한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당시 수준의 대규모 식량난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이 장기화되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10년전 인육순대 사건 목격” 탈북자 6명 北참상 증언
북한의 식량난이 극심하던 1990년대 중후반 아이를 살해해 인육을 먹는 등 참극이 빚어졌다는 탈북자의 증언이 나왔다.
올해 5월 탈북자로는 처음으로 ‘비정치적 망명’이 허용돼 3개월째 미국에서 생활 중인 탈북자 6명(본보 5월 22일자 A1·6면 기사 참조)은 19일 워싱턴 미 상원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미국 망명 과정에 도움을 준 샘 브라운백(공화·캔자스 주) 상원의원의 주선으로 이뤄진 이날 회견에서 이들은 신분 노출을 우려해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야구모를 눌러쓴 채 증언했다.
1997년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머물다가 3번이나 북송을 당했던 신요셉(가명·32) 씨는 “1996년 직접 보고 들은 일”이라며 끔찍한 인육사건을 회고했다.
“우리 집 옆 동네의 장마당(시장)에서 순대를 팔던 부부가 있었다. 이들은 부모가 식량을 구하러 간 동안 장마당에서 빌어먹던 아이 13명을 살해했다. 그 후 아이들의 내장으로 만든 순대를 팔다가 적발됐다. 나도 사먹었는데…. 13번째 죽은 아이를 발견했을 때 어느 집 아이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학교 마당에 아이의 머리를 두고 전교생에게 직접 확인시키기도 했다. 동생 찬미도 이를 목격했다.”
요셉 씨는 또 “중국에서 공안에게 잡혀 북송된 뒤 수용소의 지하 10m 감방에서 6개월간 지냈다. 몸이 공중에 매달린 채 매질을 당했으며 고문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은 평양 어린이들의 현실에 대한 질문을 받고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학생이 30명인 반에 교과서가 10권 정도만 공급된다. 유엔에서 과자가 지원되는데 교원과 교장이 (중간에서) 떼어먹어 학생들에겐 일부만 지원된다”고 주장했다.
이날 회견 도중 방청석에서 “한국 측 햇볕정책의 실효성을 북한 땅에서 느낄 수 있었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찬미 양은 “한국에서 북한에 물자 지원을 많이 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주민들에게는 혜택이 오지 않았다. 전쟁 준비나 핵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李통일 “쌀 지원중단, 대북제재 동참 아니다”
남북장관급회담 결렬과 이산가족 상봉 중단 등에 따른 책임론으로 코너에 몰린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장관은 20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브리핑을 통해 “국제사회와 대화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북한의 태도는 잘못됐다”며 “그렇다고 (유엔 결의문을 넘어) 압박과 제재만을 통해 이 문제를 풀려는 움직임도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정부가 쌀, 비료 지원에 대해 유보 결정을 내린 것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동참하려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한국의 우려와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미사일 발사로 상황을 악화시킨 데 따른 우리의 독자적인 판단”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유엔 대북 결의문, 우리의 대응은’이라는 주제로 열린 MBC ‘100분 토론’에서는 금강산 개성공단 사업에서 나오는 달러가 군사자금으로 전용(轉用)되고 있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 장관은 “지금까지 개성공단에 투입된 돈은 2400만 달러고, 미국이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해 북측에 지급한 돈은 2500만 달러”라며 “금강산과 개성공단 사업은 한반도 안보환경 개선을 위한 것이고 우리의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장관이 TV 공개 토론에까지 직접 나선 것은 정부 안팎에서 문책론이 거세지는 상황에 직접 맞서 보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편 한나라당 유기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 중단은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 실패를 보여 주는 것인 만큼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면서 “대북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이 장관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