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얀 마텔 지음·황보석 옮김/436쪽·1만 원·작가정신
작가 얀 마텔의 부커상 수상작 ‘파이 이야기’가 국내에서 조용한 인기몰이를 하면서 그의 마니아 독자층이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그런 만큼 작가가 쓴 첫 장편소설 ‘셀프’의 출간 소식에 환호할 사람이 많을 듯싶다.
‘셀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문장이 까다로운 편이지만 지나치게 어려운 건 아니다. 오히려 한 문장 한 문장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그만큼 의미 있게 짜인 작품이다.
이야기는 한 젊은 소설가가 써 내려간 자서전 형식이다. 언뜻 보기에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좀 황당하다. 외교관 부모를 따라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유년 시절을 보낸 소년 화자가 열여덟 살 때 느닷없이 여자가 된다는 것. 그러잖아도 ‘나’는 사내애인 친구 노아와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일찌감치 절망했고 지렁이가 암수한몸이라는 데 감탄했던 터다.
하루아침에 성별이 뒤바뀐 대목은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를 떠올리게 한다. 1900년대 초반의 여성 작가 울프가 여성이 된 남성의 목소리를 통해 성 차별을 작품화했던 것과 달리, 21세기 남성 작가인 마텔은 같은 사건을 통해 섹슈얼리티와 사랑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가슴의 털이 다 빠지고 월경을 치르게 된 ‘나’. 남성이었을 때의 습관처럼 여성과 연애했지만 주변에서 보기엔 동성애다. ‘나’는 자연스럽게 신체에 맞는 짝, ‘남성’을 찾아 나서게 된다.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이 누구를 현재의 그로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다. 남성이 여성이 돼 버린 판타지 같은 일로 인해 20대에 가깝도록 지켜왔던 남성이라는 성 정체성이 바뀔 정도로, 인간은 유약한 존재다.
방황 끝에 화자가 안착하게 된 것은 운명 같은 남자를 만나면서다.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면서 ‘나’는 행복감에 젖는다. 변한 것은 육체일 뿐이며 자신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또 상대가 어떤 성(性)이든,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작가는 전달한다.
성 묘사가 포르노에 가까울 정도로 적나라하다. 수음, 동성애, 강간 등 온갖 행위를 노골적으로 그려놓는데, 흥미롭거나 민망한 게 아니라 이상하게 쓸쓸하다. 가까워지기 위해 몸을 섞지만 그럴수록 고독해지는 현대인의 풍경이다.
마텔은 소설 곳곳에 영어와 프랑스어를 동시 배치해 두 언어의 유사성을 보여 주려 했는데, 한국어판에선 그런 맛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몇몇 쪽을 두 단으로 만들고 곳곳에 여백을 두는 등 기존 소설에선 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을 도입한 것만으로도 그의 실험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 원제 ‘Self’(1996년).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