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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한 역사 읽기 30선]광해군

입력 | 2006-07-24 03:03:00


《전쟁이 끝난 뒤 명나라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동원지역(東援之役)이라 불렀다. ‘동원’이란 ‘동국, 즉 조선을 도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조선 지배층은 명군의 참전과 원조를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불렀다. ‘망해 가던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은혜’라는 뜻이다. 동원지역이란 말을 통해 ‘시혜자’임을 강조했던 명의 자부심에 재조지은을 숭앙하는 조선 지배층의 저자세가 맞물리면서 임진왜란 이후 명은 조선에 이전에 비해 훨씬 버거운 존재가 되었다. ―본문 중에서》

위에 나온 문장의 행간에서 우리는 광해군의 가쁜 숨소리를 듣는다. 밖으로는 명나라가 임진왜란의 공을 내세우며 끊임없이 무리한 요구를 해 오고, 안으로는 사대부들이 대의명분을 들고 나와 압박한다. 내정과 외치가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광해군은 어떤 선택을 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로 전달되는가? 이것은 역사학자인 저자가 ‘광해군’을 서술하면서 시종 놓지 않던 화두였다.

‘반정’이란 이름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킨 서인 세력은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것’, ‘명의 은혜를 배반한 것’을 광해군이 지은 최대의 ‘죄악’이라고 선전했다. 이렇게 해 쫓겨난 광해군은 강화도, 태안, 교동 등으로 옮겨가며 유배 생활을 하였으며, 1641년 7월 1일 제주도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부고를 듣고 제주목사 이시방이 찾아갔을 때 계집종이 혼자 염을 하고 있었다.

인조는 과연 ‘반정’을 했을까? 반정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른 세상으로 되돌린다는 말이다. 그들은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再造之慶)’로 자신의 쿠데타를 미화했다. 그러나 광해군 정권을 파괴하는 데 과감했던 그들의 조선은 과연 어떠했던가? 일관성 없이 척화와 주화를 반복하다가, 병자호란을 맞아 인조가 오랑캐 왕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능욕을 당하지 않았던가!

내치에 문제가 없지 않으나, 이 책의 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다. 명에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되 조선의 존망을 걸어야 하는 요구는 거부한다. 후금이 오랑캐임은 분명하지만 우선 그들을 다독거려 침략을 막고, 거기서 얻어진 시간으로 실력을 배양한다. 이 같은 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중국의 무리한 요구나 조선 사대부들의 저자세를 모두 넘어서는 것이었고, 당시의 국제정세를 섬세하게 살핀 결과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끊임없이 오늘날 우리의 역사 현실을 되묻는다. 6·25전쟁을 치른 뒤 미국은 우리에게 은인이자 우방으로 인식되어 왔다. 임란 후 중국에 대하여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국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밖에도 광해군이 명과 후금의 동향을 철저하게 파악했던 것이나, 유연한 외교로 얻어진 평화의 시간을 통해 힘 기르기를 역설했던 것도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다.

나는 줄어드는 페이지를 안타까워하며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그것은 저자의 탄력적인 문장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승자의 기록에서 빛을 잃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저자의 날카로운 붓끝에서 새롭게 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광해군의 명암을 함께 이야기하는 서늘한 역사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승자의 역사 이면에 흐르는 진실의 강을 감동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한명기의 ‘광해군’은 이런 마력을 지닌 책이다.

정우락 경북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