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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棺이 모자라…” 통곡의 땅 레바논

입력 | 2006-07-24 03:03:00


22일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피란민 행렬이 빠져나간 레바논 남부도시 티레의 한 마을. 불에 탄 채 널브러져 있는 시신을 들개 몇 마리가 물어뜯고 있었다. 건물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무너졌고, 깨진 시멘트 더미에 그대로 파묻힌 시신도 몇 구 보였다.

티레 시립병원에는 피 흘리는 부상자보다 시신이 더 많은 상황. 의료진은 “병원이 아니라 시신 보관소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 장의사들은 “한꺼번에 100구 이상의 시신이 들어왔지만 관을 짤 나무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는 23일 외신들이 전한 레바논 참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스라엘의 공습이 집중된 남부지역에서는 어린이들의 피해도 컸다. 티레의 한 공무원은 “시신보관실로 운구된 115구의 시신 중 50구는 어린아이였다”고 증언했다.

12일간의 무력충돌로 지금까지 레바논인이 380명 넘게 숨졌고 1000여 명이 부상했다. ‘엑소더스’ 행렬이 이어지면서 피란민도 6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유엔은 추산하고 있다.

남부 도시들을 빠져나가는 주요 도로는 22일 새벽부터 수천 대의 승용차와 낡은 트럭들로 주차장이 됐다. 다른 마을의 학교 건물과 관공서로 피신한 사람들은 물과 식량, 생필품이 부족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계란을 비롯한 식료품 가격은 2, 3배로 뛰었다.

그렇지만 양측의 충돌은 계속됐다. 이스라엘은 22일 레바논 남부의 마룬 알라스 마을로 진격해 헤즈볼라 무장대원들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마을을 장악했다. 이어 23일 새벽 수도 베이루트와 시돈 등을 폭격해 전기 통신 시설을 파괴했다. 헤즈볼라도 50발 이상의 로켓을 이스라엘 북부로 쏘며 맞대응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 남부의 14개 마을 주민들에게 되도록 빨리 마을을 떠나라고 촉구하는 내용의 전단을 공중에서 뿌리며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2, 3주 추가 공습 및 지상군 공격을 전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유엔은 이날 “레바논에서 인도적 구호활동을 벌이는 데 최소 1억 달러(약 950억 원)가 당장 필요하다”고 밝혔다. 얀 에옐란 유엔 긴급구호조정관은 “현재 상황은 매우 심각하며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美 구상은 ‘중동 반미사슬’ 끊기▼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23일 중동으로 급파됐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리아와 이란의 관계를 갈라놓기 위한 방문이라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시리아는 레바논 무장세력 헤즈볼라에 이란제 무기와 자금을 공급하고 있다. 레바논 사태 해결의 중간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직접 시리아를 설득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미국은 시리아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잔당 제거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동안 제재를 가해 왔다. 결국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요르단 등 아랍 국가들이 시리아 설득에 나서도록 한다는 게 라이스 장관의 이번 중동구상이다.

▽10년 전의 전철 밟지 않는다=라이스 장관은 중동 방문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과 레바논 헤즈볼라 간의 즉각적인 휴전은 없다”는 미국의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1996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가 싸울 때는 당시 워런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이 휴전 중재를 위해 10일간 다마스쿠스(시리아), 베이루트(레바논), 예루살렘(이스라엘)을 오갔지만 그런 식의 외교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라이스 장관은 “현상 유지 외교에는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이번 레바논 사태를 임기 초부터 추진해 온 ‘대(大)중동개혁구상’의 확실한 계기로 활용하려 하고 있다.

▽이란과 시리아를 이간시켜라=미국의 목표는 이란과 시리아 사이를 갈라놓는 것. 두 나라는 미국이라는 ‘공동의 적’ 때문에 부쩍 가까워지긴 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결코 좋을 수 없는 사이. 시리아는 아랍에 속하고 이란은 페르시아에 속한다. 현재 이란과 동맹하고 있는 유일한 아랍 국가가 시리아. 바로 이 점이 같은 아랍 국가인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를 불쾌하게 하고 있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시리아는 대부분의 아랍 국가처럼 수니파가 다수다. 반면 이란과 이라크는 시아파가 다수다.

▽헤즈볼라는 이란의 대리인=1979년 이란 혁명 전까지만 해도 이란은 레바논에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란은 혁명 후인 1982년 급진 이슬람 학자인 알리 아크바르 모타샤미푸르를 시리아 주재 대사로 보내 레바논 남부에 이란 헤즈볼라 지부를 창설케 했다. 레바논 헤즈볼라는 정치세력화 노선을 취하다가 강경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이란이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통해 이스라엘 협공을 꾀하고 있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다. 이란이 중동 위기를 부추겨 핵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미국을 우회적으로 압박하려 한다는 분석도 있다.

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