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후 한국 외교는 최고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 이유는 한국이 북한의 ‘민족공조론의 덫’에 걸려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끼리로 상징되는 민족공조론은 국제공조를 차단하기 위해 북한이 만들어 낸 허구적 선전문구에 불과하다. 오늘날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은 민족공조가 아니라 세계화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간 결과이다.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전후하여 민족공조에 집착하다가 노무현 정부는 안팎으로 얻어맞는 꼴이 되고 말았다. 6·25전쟁 이후 최초로 통과된 대한반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논의 과정에서 한국은 우방인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왕따’를 당하고 말았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이 안보리 논의 과정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동안 일본에 대해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각을 세워 온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허세에 불과했다는 것이 입증되고 말았다. 이런 외교적 수모를 당하고서도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책임지려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한국 외교의 현주소이다.
지금까지 북한에 그렇게 많이 퍼 주었는데 고작 돌아온 것은 북한의 일방적인 이산가족 상봉 중단 선언이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진행되어 온 이산가족 상봉을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북한의 행태는 북한이 주장해 온 민족공조의 허구성을 그대로 보여 준다.
국민의 혈세로 북한을 지원하고서도 우리의 정당한 군사안보 및 인도적 요구를 관철하지 못하는 정부의 대북한 저자세와 눈치 보기에 이제 국민은 신물이 난다.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정부 부처는 국익을 우선시하고 국민의 여론을 존중해야 된다. 이런 국민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북한에 계속 일방적으로 퍼 주겠다고 한다면 그 주무 부처인 통일부의 기능 조정과 축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국민의 여론이다.
민족공조에서 국제공조 노선으로 빨리 정책 전환을 하지 않을 경우 한국은 국제사회의 외톨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번 안보리 결의를 통해 북한 문제는 ‘남한 대 북한’ 혹은 ‘북한 대 미국’이라는 양자 방식으로는 더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안보리 결의문 통과 과정에서 일본의 적극적 역할에 ‘앗 뜨거워라’한 것은 중국이다. 앞으로 동북아 질서 형성의 주도권을 일본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국은 더는 북한을 감싸고 돌 수 없게 되었고 국제공조 노선에 올라탔다. 우리 정부도 더는 어정쩡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한미일 공조를 기초로 한 확고한 국제공조 노선을 취할 때만이 우리의 선택지가 훨씬 넓어질 수 있다.
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 워싱턴을 중심으로 북한 문제는 ‘헬싱키 협정’ 모델을 따라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국제적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다. 1975년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유럽 35개 국가에 의해 체결된 이 협정은 안보 경제 인권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룸으로써 동서 긴장 완화에 크게 기여했다.
헬싱키 모델을 따를 경우 기존 6자회담은 단순히 북한의 핵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자간 대 북한 불가침선언, 북한판 마셜플랜 및 대북한 인권 문제를 동시적으로 고려하고 21세기 동북아 지역의 새로운 국제정치질서의 틀을 짜는 수준으로 격상될 것이다. 안보리에서 대북한 결의문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는 사실은 ‘동북아판 헬싱키 모델’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한말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민족공조의 미망(迷妄)에서 깨어나 급변하는 주변 정세의 움직임에 능동적이고 발 빠르게 대처해 나가야 할 때이다.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