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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일과 삶/이은정]셰프는 꿈도 맛있다

입력 | 2006-07-25 03:00:00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인연으로 나는 미국 뉴욕의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라는 요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미 중앙정보국과 이니셜은 같지만 물론 아무 상관이 없다. 1995년 12월 추운 겨울, 친척 오빠가 나를 기숙사에 데려다 주고 간 뒤 나는 방에 혼자 남았다. 요리학교에는 신라호텔에서 온 두 명의 남자 조리사가 유학생으로 와 있었는데 “여성이 왜 이 힘든 곳에 왔느냐”고 물었다. 그때는 ‘나를 어떻게 보고…’ 하며 약간은 섭섭했다. 그런데 조리사로 근무한 연수가 늘어나면서 그때 그들의 말을 이해하게 됐다.

내가 CIA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진 뒤 이 학교로 유학을 가겠다며 e메일과 전화로 문의하는 이들이 있다. 그중 기억나는 사람으로 명문대에서 공대 대학원까지 마치고 대기업 프로그래머를 하는 32세의 남자가 있었다. 꼭 조리사가 되고 싶으니 한번 만나 달라고 했다.

상황을 들은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요리학교 유학 후 조리사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본업에 충실하면서 요리는 취미로 하라”고 말해 주었다. 좋아하는 일과 그 일이 생계를 위해 할 때는 또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조리사로 시작하기에는 나이가 많아 겪어야 할 어려움이 많고 현재 직장보다 보수도 낮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12년 선배 조리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과거에는 많은 사람이 가난해서 조리사 보조로 일하면서 공부해 조리사가 되었다고 한다. 맞선 자리에서 호텔 조리사라고 솔직하게 소개하지 못하고 그냥 호텔에서 근무한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대학에서 조리과에 다니는 학생이나 조리사들이 미팅을 할 때 자신의 전공과 직업을 자신 있게 말할 정도가 됐다.

CIA에서는 CIA 졸업생 중 성공한 선배 셰프(chef·주방장)가 와서 학생들에게 본인이 개발한 음식을 가르치는 과정이 있다. 이때 선보인 음식은 ‘성공한 셰프의 요리 모음’이라고 해서 멋있게 촬영하고 편집해 요리 전문 TV 채널에도 소개된다.

1996년 뉴욕 맨해튼 ‘21세기 클럽’의 셰프 오너(주인 겸 주방장)인 마이클 레모나도 씨는 형이 돈 많이 버는 의사인데도 자신을 너무 부러워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유명 식당 오너로서 돈도 잘 벌고, 요리책도 출판하고, 매스컴도 타고 해서 나도 평소 부러워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에도 조리사가 이렇게 높은 평가와 인기를 누릴 때가 오겠지 하는 기대를 해 본다. 나도 성공한 셰프가 되어 모교에서 요리 시범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식당을 차리는 후배들도 있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는 이런 경우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말한다. 요즘같이 식당이 많은 때 충분한 준비 없이 식당을 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식당이 가업인 후배 중에는 부모의 명성과 도움으로 잘 운영하는 것을 보았는데, 부모의 오랜 경험과 경륜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호텔 조리사’라고 하니까 식당을 해 보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많이 배울수록, 많이 알수록 식당을 차리는 것이 더 어렵다. 아직 조리와 식당 운영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이은정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조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