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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팩션

입력 | 2006-07-26 03:06:00


경복궁 근정전. 임금이 최근 정국에 관한 의견을 도열한 문무 대신들에게 묻는다. 한 신하가 답한다. “전하, 지 생각은예, 이래 하는 게 좋겠심더.” 조선 중기 훈구척신을 몰아내고 사림파가 득세했을 때의 궁궐 풍경을 상상해 본 것이다. 궁궐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드라마와 영화에서 사투리를 쓰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방의 유림들이 중앙에 진출했을 때 표준말을 쓰는 훈구파와 사투리를 쓰는 사림파 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팩션(faction)’이란 ‘사실(fact)’과 ‘픽션(fiction)’을 결합한 신조어다. 동서고금 가릴 것 없이 역사 이야기만큼 좋은 드라마 소재는 없다. 몇 년 전 ‘뭬∼야’라는 말을 유행시켰던 드라마 ‘여인천하’부터 한류 열풍을 증폭시킨 ‘대장금’, 연산군의 비극과 동성애 코드를 버무린 영화 ‘왕의 남자’까지.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에서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되 남녀 간 로맨스를 붙이고 그럴듯한 플롯을 구성하는 것은 작가들의 몫이다.

▷대중문화에서 팩션이 활개 치는 현상은 외국이 먼저였다. 소설 ‘다빈치코드’는 예수라는 실존인물이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결합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모았던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는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아들 코모두스에게 살해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것은 갈등 구조를 만들기 위한 극적 장치일 뿐이다. 그런데도 인터넷에는 이런 질문이 뜬다. “코모두스는 왜 아버지를 살해했나요?”

▷최근 팩션 장르가 역사의 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고 해서 논란이다.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당나라 태종을 퇴각시킨 안시성 전투를 연개소문이 지휘한 것으로 묘사한 것도 한 예다. 사실과 사실 사이의 틈을 메우는 것은 상상력이다. 그러나 오락성이 강한 드라마라고 해서 엄연한 사실까지 왜곡하는 것은 무책임 또는 고민 부족 탓이 아닐까. 드라마 앞뒤에 ‘이 내용은 픽션입니다’라는 자막이라도 넣는 자세가 아쉽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