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돈 빼서 달아나기, 고객 계좌 돌려 막기, 전과자에게 개인 사무실 내주기….’
최근 잇따라 벌어지고 있는 국내 증권사들의 한심스러운 ‘자화상’이다.
증권사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최근 한두 달 사이 증권 사고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 금융당국의 관리 감독이 소홀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증권사들의 모임인 한국증권업협회는 24일부터 자체 실태조사에 나섰다.
○ 고객 돈을 제멋대로
이달 중순 현대증권 전북 익산지점. 여직원 한 명이 손님 예탁금 3억400만 원을 들고 잠적해 버렸다.
이 여직원은 가정에서도 편하게 주식거래를 할 수 있는 홈트레이딩시스템(HTS)에 접속해 고객의 비밀번호와 주민등록번호를 치고 들어가 계좌이체를 한 뒤 다음 날부터 출근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교보증권 대전 둔산지점. 직원 한 명이 A 고객의 계좌에서 돈을 인출해 B 고객의 계좌로 입금하는 ‘돌려 막기’를 하다 고객의 신고로 적발됐다. 횡령 피해금액은 2억690만 원. 교보증권 측은 “자신이 관리하던 고객 계좌에서 손실이 크게 나자 이를 막으려다 사고가 생겼다”고 밝혔다.
○ 큰손에 휘둘리는 증권사
증권업계의 어이없는 행태는 이뿐만이 아니다.
사기전과 1범의 전과자가 버젓이 증권사 지점에서 투자상담을 해 고객 돈을 가로챈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문제가 생긴 곳은 미래에셋증권의 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지점.
사건은 2004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의자 이모(42) 씨는 수입 고급 승용차를 타고 이곳에 들러 “주식투자를 할 테니 VIP룸을 달라”고 했다.
‘큰손’들을 유치하기 위해 증권사들이 따로 VIP룸을 제공하는 건 관행적인 일.
이 간 큰 사기꾼은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며 자신을 ‘미래에셋증권 부장’이라고 속여 투자자들을 모집했다. 명함을 만들고 여비서도 뒀다.
이렇게 끌어 모은 돈이 무려 110억 원. 그는 1년 반 동안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방식으로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줬다. 하지만 주식투자 등으로 수십억 원을 쓴뒤 지난달 행방을 감췄다가 곧 경찰에 붙잡혔다.
미래에셋 측은 “우리도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투자자들은 증권사 측에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증권사들만 얼이 빠진 게 아니다.
21일 금융감독원은 한국증권선물거래소 측에 “불법 주식 거래를 한 거래소 직원 8명을 징계조치하라”고 통보했다. 이들은 월급의 50% 이내에서 증권저축계좌를 이용한 주식투자만 할 수 있는 규정을 어기고 위탁계좌를 만들어 직접 주식투자를 했다.
○ 내부통제시스템 강화해야
증권사들은 직원들이 ‘모럴 해저드’에 빠지면 막을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다.
현대증권 감사실 관계자는 “은행과 달리 증권사 거래 고객들은 친한 증권사 직원에게 통장과 비밀번호 등을 맡겨 놓고 거래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직원이 작심하면 사고를 막기 힘들다”고 했다.
증권업협회 자율규제부 안치영 부장은 “각 영업 현장에 준법감시 직원이 상주하지 않는 이상 불법행위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증권사 스스로 내부통제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