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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몰래 탄 엄마 곗돈…엄마 몰래 감춘 아빠 비상금 어디에

입력 | 2006-07-28 03:00:00


《한상희(가명·52·여) 씨는 13년째 계를 한다. 2003년 곗돈 1500만 원을 탔을 때는 500만 원을 장롱 깊숙이 넣어 뒀다. 돈이 급히 필요할 때를 대비해서다. 올해도 1500만 원을 탔다. 1200만 원으로 빚을 갚고 나머지는 모두 보험료와 할부대금이 빠져나가는 계좌에 넣었다. 이달 말 제대하는 아들 대학등록금은 카드로 내기로 했다. 한 씨가 수 년 동안 금고로 이용해 온 12자짜리 ‘장롱’엔 지금 현금이 없다. 집에서 보관하는 현금인 ‘장롱예금’이 사실상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본보 취재팀이 27일 한국은행에 의뢰해 가계 화폐 보유 실태를 추정한 결과 2002년 최대 1조7000억 원에 이르던 장롱예금이 작년 말에는 ‘존재한다고 보기 힘든 수준’으로 미미해졌다.》

○ 바닥 드러난 장롱예금

한은에 따르면 장롱예금의 최대 추정 규모는 △2000년 1조 원 △2001년 1조6000억 원 △2002년 1조7000억 원으로 매년 늘다가 이후 감소세로 돌아서 2004년 3000억 원에 이어 지난해 바닥을 드러냈다.

금융회사를 이용하기 힘들던 시절 서민의 든든한 금고 역할을 하던 장롱예금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실질소득 감소로 소비자들이 집에 두고 쓸 수 있는 여윳돈이 적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음향기기 회사에 다니는 민태형(33) 씨. 2년째 임금이 동결되면서 생활비 외에 쓸 수 있는 돈이 거의 없다. 지난달 말엔 월세까지 밀렸다. 급기야 자취방 장판 밑에 1년이나 넣어둬 꼬깃꼬깃해진 비상금 30만 원을 꺼내 썼다고 한다.

신용카드 등 현금 대신 사용할 수 있는 결제 수단이 많아지면서 집에 돈을 쌓아 둘 필요가 없어진 것도 한 요인이다. 2004년 기준 전체 소비 지출액 가운데 현금 사용액 비율은 4.7%로 1970년 이후 가장 낮았다.

서울 명동에서 사채업을 하는 박모(49) 씨는 “요즘 사채시장에서도 대출금과 이자 납입 등 현금 거래는 주로 모바일뱅킹을 이용한다”고 귀띔했다.

수익률이 높은 다양한 금융상품의 등장도 장롱예금이 없어지게 된 배경이다. 올해 6월 말 현재 자산운용회사의 펀드 규모는 222조 원으로 2000년 말에 비해 84조 원 늘었다.

집에 현금을 두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도 한몫했다. 특히 20, 30대 젊은층이 장롱예금을 기피한다.

전업 주부인 강혜영(31) 씨는 장을 보고 난 뒤 남은 돈이나 부업으로 번 돈이 10만 원 정도 되면 바로 예금한다. 강 씨는 “집에 돈을 보관하면 나중에 어디에 뒀는지 기억 못할 것 같다”고 했다.

○ 돈이 장롱 밖으로는 나왔지만…

가계에 묶여 있던 돈이 집 밖으로 나왔지만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 경제성장에는 뚜렷하게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은행 기업 정부 등 주요 경제 주체들 사이의 금융 및 상거래가 뜸해지면서 돈이 흐르는 속도가 느려진 때문이다.

한은은 올 1분기(1∼3월) 통화 한 단위가 상거래에 사용된 횟수는 0.799회로 2000년대 들어 가장 적었다고 밝혔다. 이 횟수는 경기가 좋을 때 많아지고 나쁠 때는 적어진다.

통화 거래 횟수가 줄어든 것은 장롱예금이 은행권이나 자산시장으로 유입된 뒤 움직이지 않거나 해외 자산시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기업들이 투자를 꺼린다는 이유로 돈을 금고에 쌓아 두기만 하고 자산운용회사들은 국내보다는 인도 중국 등 외국 투자처만 기웃거린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위원은 “기계설비, 토목, 건축 등 국내 실물경제로 흘러들어 가야 할 돈이 금융시장에 머물고 있다”며 “이는 고령화가 진행 중인 나라에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 유망 성장산업에 써야

경제전문가들은 장롱예금을 생산적인 분야에 쓰려면 은행들이 대기업 중심의 대출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금이 풍부해 굳이 은행 대출이 필요 없는 대기업 대신 돈이 필요한 중소기업을 적극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손민중 연구원은 “부동산이나 해외 자산에 묶인 자금을 성장에 활용하려면 정부가 생명공학기술(BT)이나 환경공학기술(ET) 분야에 예산을 먼저 투자해 민간 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고 했다.

경희대 안재욱(경제학) 교수는 “부동산 관련 규제를 완화해 기업들이 건설 투자에 나서도록 하면 (장롱예금을 포함한) 자금 회전이 원활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