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고법의 인도 거부 결정으로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된 베트남 반정부 인사 응우옌흐우짜인 씨(왼쪽)가 마중 나온 부인(가운데), 아들을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고 있다. 의왕=연합뉴스
베트남 정부로부터 태국 주재 베트남대사관 폭탄테러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돼 국내에서 체포된 베트남 반체제 인사가 법원의 신병 인도 거부 결정으로 본국 송환 대신 자유의 몸이 됐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판사 구욱서)는 27일 베트남인 응우옌흐우짜인(57) 씨에 대한 범죄인인도심사 청구 사건에서 “짜인 씨의 본국 인도를 허가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외국 반체제 인사에 대한 법원의 인도 심사는 사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재판부는 “짜인 씨의 범죄는 폭발물 테러라는 일반 범죄와 베트남 정치질서에 반대하는 정치범죄가 결합된 것”이라며 “정치적 성격을 지닌 범죄자는 인도하지 않는다는 한국-베트남 간 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신병 인도를 불허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폭탄테러행위의 억제를 위한 국제협약’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등을 근거로 내세우며 짜인 씨가 정치범이라 하더라도 신병을 넘겨 줘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베트남은 이 국제협약에 가입하지 않았고, 안보리 결의에는 범죄인 인도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외국 정부의 요청으로 검찰이 청구한 범죄인인도심사에서 법원이 거부 결정을 내린 것은 그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다. 더욱이 한-베트남은 1992년 국교 정상화 이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재판부도 이런 점을 의식한 때문인지 “이번 결정은 두 나라 간의 조약을 우선적으로 검토해 내린 법리적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외교 현실보다는 국제법의 기본 원칙인 ‘정치범 불인도 원칙’을 철저하게 따랐다는 얘기다. 범죄인인도심사 청구 사건은 대법원에 상소하는 절차가 없어 그대로 확정됐으며, 짜인 씨는 3개월여 동안 수감돼 있던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이날 오후 4시경 석방됐다.
이번 결정으로 양국 간 외교 마찰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올해 5월 베트남 대통령이 청와대에 짜인 씨의 인도를 요청하는 친서를 보내는 등 베트남 정부는 이번 사건에 깊은 관심을 표명해 왔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 석방된 짜인 씨는
982년 가족들과 함께 어선을 타고 베트남을 탈출한 ‘보트피플’인 짜인 씨는 미국에서 건축업으로 상당한 부를 쌓은 뒤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다.
1995년 베트남 정권에 반대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베트남 정부’ 창건 과정에도 참여해 초대 국무장관을 거쳐 내각 수반을 지냈다.
베트남 정부는 해외에서 반정부 활동을 벌여온 짜인 씨를 2001년 6월 발생한 태국 주재 베트남대사관 폭탄테러의 배후 인물로 보고 반체제 인사로 지목해 왔다. 짜인 씨는 올해 4월 한국에 사업차 입국했다가 베트남 정부의 범죄인인도 요청으로 검찰에 의해 수감됐다.
27일 오후 석방된 짜인 씨는 기자들과 만나 “이번 일로 한국 정부가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해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짜인 씨는 베트남 정부가 주장한 범죄 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그는 “내 지시를 받은 것으로 혐의가 조작된 동지들은 이미 베트남 법원에서 징역 20년의 형을 받았다”며 “만일 한국 법원이 인도 결정을 내렸다면 나는 거짓 혐의로 중형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짜인 씨는 “아들 네 명의 이름을 합하면 ‘더 나은 조국을 위하여’라는 뜻”이라며 “앞으로 조국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짜인 씨는 2, 3일간 한국에 머문 뒤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