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끼리 외치는 구호는 싫어요. 학생들의 목소리를 입법에 반영할 수 있어야죠.”
이모(여·한국외국어대 3년) 씨는 5·31지방선거 기간에 열린우리당 강금실 서울시장 후보 대학생 캠프에서 일했다. 30여 명으로 구성된 이 캠프는 대학생 학술문화축제 지원금 보조, 대학생 전세 보조금 등 학생 관련 정책을 제시했고 이 중 10가지가 강 후보의 공약으로 채택됐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주도의 운동권이 쇠퇴하면서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대학생들이 기성 정당으로 직접 눈을 돌리고 있다.
가장 앞서 있는 민주노동당은 전국 80여 개 대학에서 위원회를 조직해 6000여 명이 활동 중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내년 대선을 겨냥해 조만간 본격적으로 대학생 조직을 구축하기로 했다.
▽거침없는 목소리들=김치언(22·여·이화여대 3년) 한나라당 ‘2030위원회’ 부위원장은 “학교 등록금 문제가 앉아서 구호만 외치면 뭐가 달라지느냐”고 말했다. 주로 대학생들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매달 모임에서 합의된 건의사항을 당에 전달한다.
열린우리당 산하 열린정책연구원에서 활동 중인 김모(여·이화여대 4년) 씨는 “정당과 연계된 학생활동은 투쟁적 학생운동의 대안”이라고 말했다.
민노당 학생위원회는 기자회견, 입법활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참여를 하고있다. 지난해에는 비민주적인 학칙을 조사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기도 했다.
반면 1980년대 후반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후신인 한총련은 갈수록 입지가 좁아져 최근엔 주로 반미 친북 성향의 외부 시민단체들의 투쟁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다. ‘범대위’ 등의 주관으로 열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에서 한총련은 행동대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대학생 정당조직, 문제는?=대학생 정당 조직 중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민노당 학생위는 정기적으로 소액의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들로 구성돼 있으며 중앙당과 운영위원회, 집행위원회, 학교별 대학위원회 등 피라미드식 형태를 띠고 있다. 민노당 대학위 본부는 거의 매일, 운영위는 매월 두 차례 모임을 한다.
민노당 학생위 측은 민노당과의 수직적 종속 관계를 부인하고 민노당 중앙당도 이에 동의한다. 문제는 이들이 제도권에 진출한 정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기존 운동권의 과격한 행태를 답습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난다는 점.
이들은 폭력이 난무했던 반(反)FTA 시위, 평택 시위 등에 참여했고 지난해 고려대에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을 강제로 제지하는 등 폭력성을 노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민노당 학생위가 정책을 토론하는 제도권 정당의 일부 조직이라기보다 과격 시위를 답습하는 전통 운동권의 변형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민노당이 학생층에서의 세(勢) 확대에 급급해 학생위원회의 폭력성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학생위원회가 일반화돼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폭력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려대 박길성 사회학과 교수는 “미국은 중앙당 개념도 불확실하지만 대학의 정당위원회도 정권 창출 같은 중앙당의 목적과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개인의 정치이념을 표출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민노당과 달리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미국식 모델을 도입해 대학 조직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곧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당의 시도지부와 그 지역 대학을 연계하는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임현진 교수는 “학생들이 운동의 목표를 정하지 않을 경우 정당들의 특정 목표와 당리적 전략에 이용만 당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학생운동이 선회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이 기사 취재에는 본보 인턴기자 김정민(고려대 언어학과 3년), 윤상필(고려대 사회학과 4년), 정희균(미국 애머스트대 정치학과 3년) 씨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