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교육 부총리가 1999년 서울시의회에 제출한 연구 용역보고서(왼쪽)와 국민대 교내 학술지 ‘사회과학연구’에 게재된 논문(오른쪽). 제목만 약간 바뀌었을 뿐 내용은 동일하다. 용역보고서의 연구자는 3명이지만 논문의 저자는 김 부총리 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논문 표절 및 이중 보고 논란 등으로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김병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지방자치단체 의회의 연구용역비를 받고 쓴 논문을 국가의 연구비를 받은 사업의 실적으로 보고한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는 공공기관에서 연구비를 받고 쓴 연구보고서를 연관성이 전혀 없는 국가사업인 두뇌한국(BK)21사업의 실적으로 바꾼 첫 사례다.
김 부총리는 여러 학술지에 논문을 이중 게재하거나 BK21사업보고서에 이중 보고한 것에 대해 ‘학계의 관행’ 또는 ‘실무자의 실수’라고 해명했지만 이번 사안은 단순한 실수로 보기에는 차원이 다르다.
▽연구비 타낸 논문 재탕=김 부총리는 국민대 지방자치경영연구소장으로 재직하던 1999년 8월 서울시의회로부터 지방 분권화에 따른 권한 및 사무에 대한 연구 용역을 의뢰받았다.
김 부총리는 연구책임자였으며 용역비 1830만 원을 받았다. 이 연구에는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연구원 J 씨와 국민대 행정학과 석사과정생 K 씨 등 2명이 참여했다.
김 부총리는 같은 해 12월 서울시의회에 ‘중앙행정권한의 지방이양에 따른 자치입법적 대응방안’이란 용역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 150쪽 분량의 보고서를 외국 사례와 법률, 배경 등을 빼고 20쪽으로 편집해 2001년 2월 국민대 사회과학연구소의 교내 학술지인 ‘사회과학연구 13집’에 실었다.
이 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일부 단어만 바뀌었으며 보고서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는 공동 연구자 2명의 이름을 빼고 자신을 이 논문의 단독 연구자로 했다.
그는 이 논문의 참고문헌에 당시 서울대 박모 교수의 논문인 ‘세계화시대의 지방자치’와 인하대 이모 교수의 논문인 ‘중앙행정 권한의 지방이양 촉진 등에 관한 법률 시안의 내용과 과제’만을 적었다. 서울시의회에 제출한 보고서라는 언급은 없었다.
논문의 이름은 ‘권한이양촉진법 제정에 따른 권한이양 절차의 변화와 지방자치단체의 대응방안: 자치입법적 대응을 중심으로’로 고쳐졌다.
김 부총리는 이 논문을 BK21사업 2차 연도 실적에 넣었다. 다른 용도로 쓴 논문을 정부의 돈으로 이뤄진 것처럼 꾸민 것이다.
▽“발주처의 동의 없으면 법적인 문제”=학계 일부에서는 공공기관의 연구 보고서를 학술지에 다시 쓴 것은 논문의 중복 게재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저작권 전문가들은 “논문 내용이 얼마나 비슷하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만일 저작물을 표절한 사실이 입증된다면 복제 판매 배포에 해당하는 저작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의회 정책연구실 김정호 팀장은 “서울시의회가 당시 연구비로 1830만 원을 지급했다”며 “김 부총리 보고서엔 저작권과 관련된 사항이 적혀 있지 않으나 보통 용역을 발주한 기관이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작권을 가진 기관의 동의 없이 보고서의 내용을 학술지에 썼다면 법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연구 보고서를 학술지에 게재한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된 사례는 없다.
중앙대 제성호(법학) 교수는 “하나의 논문으로 연구비를 이중으로 받아낸 것은 학자로서 비양심적인 태도일뿐더러 부당이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며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평가와 검증 시스템이 허술한 것을 이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본보는 김 부총리의 해명을 듣기 위해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김 부총리 측 인사들은 “용역 연구 보고서라도 학술적으로 재편집해 교내 학술지에 싣는 경우가 많아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BK21사업비는 대부분 학생 장학금이며 교수에게 직접 주는 연구비는 없다”면서 “용역 보고서와 논문은 형식이 다르기 때문에 용역 보고서의 데이터를 갖고 교수가 논문을 발표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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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종 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