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넘은 세대는 대개 지리(地理)를 지루한 암기과목으로 기억한다. ‘다음 중 텅스텐이 나지 않는 곳은?’ 같은 문제를 풀기 위해 낯선 지명을 외워야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지리가 재미없던 까닭을 유우익 서울대 교수는 ‘일본 식민지배의 유산’이라고 했다. 당시 국어와 국사가 핍박은 받았지만 학문적 연구까지 금지된 건 아니었다. 반면 지리는 ‘풍수지리’로 격하돼 학문의 싹이 잘렸다. 지리를 알면 알수록 애국심이 생긴다는 이유에서다.
▷광복 후 지리과목이 제자리를 찾기는 했지만 가르칠 학자와 책이 있을 리 없었다. 비(非)전공자들이 서둘러 교과서를 만들다 보니 암기 위주의 지식과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고 3면이 바다여서…’ 식의 부정적인 ‘반도적(半島的) 결정론’만 가르치게 됐다. 유 교수도 1967년 독일에서 제대로 지리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도정 교수를 만나면서부터 ‘우리 땅’을 재발견했다고 한다. 그가 기른 제자들이 1990년대 들어 재미있는 지리교과서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는 올해 세계지리학회의 첫 비(非)유럽권 사무총장으로 뽑혔다.
▷국경 없는 인터넷 시대라고 하나 지리와 지정학(地政學)은 여전히 중요하다. 한 나라가 지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과 발전전략, 외교정책도 달라진다는 것이 지정학의 요체다. 우리나라는 반도이면서도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4강에 둘러싸여 있다. 안보적으로 취약한 반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잇는 ‘다리’로서 양쪽 문화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반도 국가는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언제든 속국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힘이 있으면 대륙과 해양 양쪽으로 뻗어 나갈 수 있지만 힘이 없으면 양쪽으로부터 압착을 당해 존립마저도 위태로워진다.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영토적 야심이 상대적으로 덜한 제3의 국가와 동맹을 맺어 부족한 힘을 보충해야 한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도국가에 사는 한 거의 숙명에 가깝다. 그게 싫다면 한반도를 통째로 들어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