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소나기를 피해 노승이 찾아들었다. 배(裵) 씨 집 대문 앞이었다.
“어디서 오신 스님이시오?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주인이 객을 집안으로 맞이한다. 배 씨가 비를 피해 찾아온 손님을 융숭하게 모시는 자리에서 노승이 입을 떼었다.
“저 아이는 뉘 집 아입니까?”
노승이 가리킨 아이는 부모가 없어 이제 막 데려온 조카아이였다. 배 씨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물으십니까?”
노승이 안타까운 듯 입을 열었다.
“어떻게 저런 아이가 있을까요? 전생 업이 두터워서 저 아이가 사는 주위 다섯 집은 굶어죽을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결국 부모 없는 조카아이는 또다시 거리로 나서야 했다.
이렇게 쫓겨난 아이가 배탁이다. 배탁은 쌍둥이 형제로 태어났다. 형은 탁, 동생의 이름은 도이다. 동생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 어디선가 비슷한 처지로 떠도는 신세.
그런데 훗날 쌍둥이는 정승과 뱃사공으로 운명이 엇갈렸다. 기구한 삶의 차이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주위 다섯 집이 굶어 죽는다는 업을 지닌 아이가 어떻게 정승이 될 수 있었을까. 더구나 황벽(黃檗) 선사의 법을 깨달은 거사가 되었으니!
그 갈림길은 다음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배탁이 삼촌 집에서 나와 목욕탕 앞을 지나갈 때였다. 귀부인의 옥대(玉帶) 하나를 주웠다. 그는 잃어버린 주인이 나타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물건 주인은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을까?”
하루 해를 넘기고도 그대로 서 있었다. 다시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난 때였다.
옥대의 임자인 귀부인이 나타나서 기다리는 그를 보고 감동했다.
“세상에 이런 착한 아이가 있다니!”
귀부인은 딱한 처지를 알고 배탁을 데려다가 키우기로 작정하였다. 이후 그의 신수가 훤해졌다. 수개월이 흐른 뒤였다. 배탁이 삼촌 집에 인사차 들렀을 때였다. 마침 예전의 노승이 자리를 같이하고 있다가 말했다.
“아 참, 아이의 신수가 놀랍게 훤해졌구려. 정승감인걸요!”
지금 이 자리가 중요하다. 무슨 잠꼬대인가. 전생의 흑업(黑業)이라니! 배탁이 착한 마음을 크게 한번 먹는 것으로 흑업은 순식간에 씻긴 것이다. 배탁은 후일 호를 휴(休)라고 하는 명정승이 되었다.
지묵 수원 아란야 선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