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 11일 앨런 그린스펀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 취임했다. 미국이 하루에 22% 주가가 폭락한 ‘검은 월요일’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대공황’의 공포가 운위될 정도였던 그해는 18여 년간 계속될 ‘미국의 경제대통령’으로서의 그린스펀의 임기가 시작된 때였다.
1926년 뉴욕 주식 중개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경제에 대한 감각은 자연스럽게 길러진 셈이다. 그렇지만 그린스펀이 당초 꿈꿨던 것은 재즈 클라리넷 연주가였다. 클라리넷을 전공하려는 시도도 했고 떠돌이 악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음악에 대한 열망보다는 유전자의 힘이 컸던지, 그는 결국 뉴욕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컬럼비아대 경제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린스펀은 사회보장제개혁 전국위원장, 재무부 관리, FRB 고문을 거쳐 FRB 의장을 맡게 된다. 미국은 위기의식으로 어수선했지만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는 호황과 불황이 반복된다는 단순한 경기순환 논리는 더는 적용되지 않으며 “실시간 정보 활용과 첨단 기술산업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신념을 바탕으로 경기 안정화 정책을 펴나갔으며 불안은 가시기 시작했다.
특히 치밀하면서도 과감한 금리 조정을 단행한 것이 높이 평가받았다. 임기 내내 미국은 이른바 ‘신경제(New Economy)’의 호황기를 누렸다.
그린스펀이 시장을 내다본다는 믿음이 증권가에 자리 잡으면서 ‘그린스펀의 입’이 오히려 시장을 이끄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의 한마디가 주가에 곧바로 영향을 미쳤다. 그린스펀의 “주가 하락에 따른 자산가치 급락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는 주가 폭락 가능성 발언이 주가지수를 단숨에 끌어내리는 식이었다.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부동산 가격 급등, 재정적자 같은 문제도 수반됐다. 그렇지만 ‘경제 마에스트로’에 대한 명성이 깎인 것은 아니었다.
경제에 대한 소신으로 정부와 마찰을 빚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으로부터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선거를 의식하고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통화량을 늘려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린스펀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린스펀은 1월 퇴임했다. 그는 평생 공화당원이지만, 퇴임환송회에는 클린턴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 씨티그룹 회장 등 당을 아우른 ‘그린스펀의 친구들’이 참석했다. 여야 모두에 사랑받았던 ‘경제대통령’의 모습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