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78) 씨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SS)에서 복무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인터넷판은 11일 이런 내용이 포함된 그라스 씨와의 회견 내용을 보도했다. 그는 다음 달 발간되는 회고록을 통해 2차 대전을 전후한 자신의 행적을 공개할 예정이다.
그라스 씨는 회견에서 “이런 과거가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 왔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랜 세월 침묵한 끝에 회고록을 내놓게 됐다”며 “당시에는 SS에서 복무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았으나 전쟁이 끝난 뒤 수치스러운 감정이 들어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는 15세 때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잠수함부대에 지원했으나 거절당한 후 군 노무자로 일하다가 17세 때 드레스덴에 주둔한 SS 제10기갑사단으로 징집돼 복무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그라스 씨는 자신의 군 복무 경력에 대해 17세 때 징집돼 교황 베네딕트 16세처럼 방공부대에서 근무한 것으로 얘기해 왔다. 그는 종전 후 부상한 채 미군 포로로 잡혀 1946년까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S는 원래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경호대였으나 이후 강제수용소를 운영하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등을 학살하는 임무를 맡아 악명을 떨쳤다.
그라스 씨는 “내 기억에는 SS가 그렇게 소름끼치는 존재가 아니었고 격전지에 파견된 엘리트 부대일 뿐이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2차 대전 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서 SS는 범죄 조직으로 규정됐다.
그는 “10대 시절의 나치 사상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며 자신이 나치 사상의 자발적인 동조자는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또 “(전쟁 참여는) 당시 많은 젊은이에게 흔했던 일”이라고 자신의 행적을 옹호했다.
나치 시대에 성장해 전쟁에서 살아남은 세대의 ‘문학적 대변자’로 불리는 그라스 씨는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양철북은 영화로 만들어져 1980년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라스 씨는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견해를 공개적으로 나타냈고 인종 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로 명성을 떨쳤다.
그라스 씨의 이 같은 고백에 대한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독일의 유대계 작가인 랄프 조르다노 씨는 그의 과거사 고백을 환영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쌓아 온 업적과 명성이 훼손됐고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는 반응도 만만치 않다.
국제펜클럽 체코본부는 13일 그라스 씨에게 수여했던 문학상의 철회를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지리 스트란스키 회장은 “우리는 이 문제를 간과하지 않을 것이며 논의에 부칠 것”이라고 말했다.
체코 펜클럽은 1994년 체코의 저명한 작가인 카렐 차페크(1890∼1938)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그라스 씨에게 수여했다. 공교롭게도 차페크의 형으로, 작가 겸 화가였던 요세프 차페크는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