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합니다. ○○씨는 △월 △일 뇌종양으로 사망했습니다. 중증 정신질환을 앓아온 환자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따라서 환자의 사망은 행운이 따른 해방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1940년 많은 독일인은 어느 날 갑자기 유골상자와 함께 날아온 사망통지서를 받아들고 눈물을 훔쳐야 했다.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1939년 9월 이른바 ‘T-4 프로그램’을 실행하라는 극비 지령에 서명했다.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자 등 부적격자에 대한 집단살인 허가 문서였다. T-4라는 이름은 그 사무국이 있던 베를린 티어가르텐 4번지에서 유래했다.
나치 정권은 부적격자를 사회로부터 제거해야 게르만 민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지킬 수 있다는 인종위생학(독일판 우생학)을 나치즘의 골간으로 삼았다. 살 가치가 없는 ‘밥벌레(useless eater)’를 죽이는 것을 나치 정권은 자비로운 ‘안락사’로 여겼다.
히틀러는 “병자나 기형아를 절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병적인 인간을 보호하려는 미친 짓에 비하면 몇천 배나 자비심 깊은 일”이라고 했다.
T-4 프로그램은 나치 독일이 혼자 낳은 기형아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에 탄생한 사이비 우생학에 따라 미국에서는 이미 1907년 인디애나 주를 시작으로 1931년까지 30개 주가 정신병자 백치 강간범을 거세하는 거세법을 시행했다.
독일도 1932년 부적격자를 자발적으로 거세하는 단종(斷種)법을 통과시켰다. 이듬해 나치가 정권을 잡자 이를 강제 규정으로 바꿔 30만 명을 거세했고, 급기야 T-4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집단살인은 ‘샤워실’로 불린 가스실에서 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런 야만적 행위의 비밀이 유지될 리 없다. 장애를 입은 참전용사에게도 예외 없이 이를 적용하자 군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종교계가 저항에 나섰다. 클레멘스 폰 갈렌 주교는 공개 강론을 통해 T-4 프로그램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히틀러는 1941년 8월 18일 T-4 프로그램의 중지를 명령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은밀한 작전은 계속됐다. 이미 7만여 명이 희생됐지만 그해 말까지 9만여 명이 추가 살해됐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로 이어졌다.
어쨌든 T-4 프로그램은 복지시설과 병원에서 환자의 수를 급감시켰다. 한 복지시설 원장은 “우리 시설에 병자는 없다. 건강한 자와 사망한 자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니….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