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생제를 연구하던 연구원이 장기간 유해 물질에 노출돼 혈액암에 걸린 것은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신모(2001년 사망 당시 39세) 씨는 1987년 제약업체 A사에 입사해 12년 간 의약품 개발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항생제ㆍ항균제ㆍ에이즈 치료제를, 2000년부터 B제약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하며 항암제ㆍ진통제 등을 개발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두 회사에서 각종 의약품 중간체를 생산하는 실험을 반복하던 신씨는 주로 벤젠과 톨루엔을 반응용매로 사용했으며 신씨가 12년(1987~1998년) 동안 사용한 유해 물질의 양은 벤젠 5057.5㎖, 톨루엔 3만3605.9㎖에 이르렀다.
신씨는 입사 이래 매년 정기검진에서 적혈구ㆍ백혈구 감소 등 혈액학적 이상이 나타난 적은 없었지만 2001년 1월 말 감기와 빈혈 증상을 느껴 병원을 찾아갔다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과 골수성 백혈병 증세가 혼재하는 급성 혼합형 백혈병이라는 `날벼락' 같은 진단을 받았다. 백혈병은 골수와 혈액에 생기는 혈액암의 일종이다.
신씨는 이후 대학병원 두 곳에서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결국 백혈병 합병증으로 입원 치료를 받다가 2001년 9월 숨졌다.
유족들은 신씨의 사망이 업무상 재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보상금과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지만 공단은 거부했고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1심도 `업무와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그러나 항소심 법원은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법 특별8부(최은수 부장판사)는 "망인은 장기간 다량의 벤젠과 톨루엔을 사용했고 벤젠에의 만성적 노출은 백혈병의 중요 인자로 알려져 있다. 백혈병과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에 부정적 소견을 제시한 병원이나 외부기관의 감정결과는 신씨가 벤젠을 사용한 적이 없었음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전제가 사실과 달라 채택하기 어렵다. 신씨의 사망은 장기간 벤젠에 노출돼 발병한 업무상 재해"라고 23일 밝혔다.
재판부는 1심 법원과 대학병원 2곳 등 대부분의 감정촉탁 및 사실조회 기관에서 벤젠ㆍ톨루엔 노출로 인한 백혈병 발병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회신했지만 한국산업안전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장은 다른 결과를 회신했다며 이 결과를 채택해 "백혈병은 벤젠에 노출돼 발병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공단측은 신씨의 근무 기간에 실험실 안전수칙이 100% 확실히 지켜졌다면 백혈병이 벤젠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낮지만 실험을 하다 보면 예기치 않게 노출되는 경우가 많은 점, 12년 동안 안전수칙이 철저히 지켜졌다고 가정하는 것은 무리인점, 발병까지 잠복기도 10년 이상으로 충분한 점 등을 들어 `백혈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