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모스크바 남쪽 레닌스키 프로스펙트에서 만난 택시운전사 이고리 바실리예비치(45) 씨는 “지난해까지 몰던 러시아 국민차 ‘라다’가 고장이 자주 나 한국차인 ‘엑센트’로 바꿨다”고 말했다. 그는 “식품을 제외한 러시아 제품은 쓸 만한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옛 소련 관료들이 애용하는 승용차였던 ‘볼가’는 올해 초 판매 부진을 이유로 생산 중단을 선언했다.
라다와 볼가가 외면당하는 현상을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라고 말하는 러시아 경제 전문가들이 늘고 있다.
‘네덜란드 병’이라는 말은 1960년대 북해 유전 개발로 막대한 오일달러를 벌어들였던 네덜란드가 길더화의 절상과 수입 증가를 겪으면서 경제 활력이 급격히 떨어진 데서 생겨났다. 당시 네덜란드는 자원 수출이 크게 늘었지만 정작 자국의 제조업과 경제는 위축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오일머니가 넘치는 러시아 경제에도 이 같은 징후가 엿보인다.
지난해 러시아 수출에서 원유 및 가스의 비중은 63%에 이르렀다. 러시아 일간지 네자비시마야 가제타는 22일 “올해 6월 러시아의 일일 원유 생산량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추월한 적이 있는데 자원 수출에 따른 부작용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보도했다.
오일머니 유입은 루블화 강세로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재무부는 “석유 수출 증가 등으로 인해 올해 상반기 루블화 가치가 달러화 및 유로화 대비 6.7% 절상됐다”고 밝혔다.
알렉세이 쿠드린 재무장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루블화의 강세가 러시아 제품의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린다”고 경고하고 있다. 7월 상트페테르부르크 G8(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을 앞두고 “다른 나라도 루블화를 사용하도록 하겠다”며 큰소리치던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수입 증가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러시아 경제개발통상부는 올해 수입이 지난해보다 27% 늘어나고, 2009년에는 올해보다 43%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수입 증가는 라다와 볼가의 부진처럼 국내 제조업체의 체질을 더욱 허약하게 만든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얘기다. 경제개발통상부 자료에 따르면 1999년 러시아의 산업경쟁력지수는 270.5였으나 2004년에는 80.7로 떨어졌다.
러시아 경제 및 재무연구센터의 나탈리야 볼초코바 수석연구원은 “지금 전 세계에서 네덜란드 병이 사라지고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며 “이것은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