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대로―나는 미국 뉴욕 맨해튼의 5번가를 걷는 기분으로 서울 강남의 이 거리를 거닌다. 197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그야말로 무(無)에서 솟아난 강남의 신시가지. 그 중심부를 직선으로 뻗는 동서 10여 km의 10차로 테헤란로는 새로운 메트로폴리스의 남쪽을 대표하는 불바르(boulevard)이다. 강북의 경복궁 앞에서 남대문까지 남북으로 뻗은 세종-태평대로가 정치 행정의 중심인 구서울을 대표하는 길이라면 강남의 테헤란로는 금융 상공의 신서울을 대표하는 길이다.
개인적인 견해일지 모르나 강북의 역사적 서울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종로 사거리의 충무공 동상이라면 강남의 미래 서울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테헤란로의 포스코 빌딩 앞에 있는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이다. 그것이 전혀 빗나간 소리만은 아니다 싶은 것은 두 조형물의 자리를 머릿속에서 한번 바꿔 놓아 보라. 세종로 사거리에 스텔라의 조각을, 테헤란로의 포스코 빌딩 앞엔 충무공 동상을? 하나의 조각 작품은 아무 데나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저마다 있어야 하는 자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부러워 마지않았던 포항제철! 나는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파란 바다와 푸른 숲에 둘러싸인 공장의 경관에 탄복했다. 독일의 루르 공업지대의 크루프나 오스트리아 린츠의 푀스트 등 그때까지 내가 구경한 유럽의 제철공장은 맑은 날에도 굴뚝에서 뿜어 대는 연기로 온 도시가 어둡고 우울했었다. 그런 기억을 지니고 포항제철을 봤을 때 뜻밖에 그 푸른 경관이 나를 기분 좋게 실망시켜 준 것이다. 들은 얘기로는 이러한 환경 조성에 당시 11억 원을 썼다던가….
서울 본사가 자리 잡은 테헤란로의 포스코 빌딩도 환경 조성에선 단연 발군이다. 건물 외부엔 현대 미술의 거장 스텔라의 작품이 뽐내고 있고, 건물 내부엔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이 메인 로비 천장에 설치된 수십 대의 TV 브라운관에서 눈짓하고 있다.
나는 예전에도 백남준과 스텔라의 작품을 또 다른 자리에서 같이 본 추억이 있다. 1988년 베를린의 내셔널 갤러리에선 5대륙을 대표하는 다섯 작가를 초빙해 ‘현대 예술의 위상’이라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작가마다 네댓 개의 방이 주어진 이 거대한 기획전에 한국에선 백남준이, 미국에선 스텔라가 동참하고 있었다.
물론 현대 예술은 일반인이 금방 친숙해질 수만은 없다. 윤이상의 열렬한 정치적 지지자 중에는 그 음악을 듣고 나선 저게 무슨 소리냐고 갸우뚱하는 사람도 많다. 유럽과 미국에선 1960년대부터 백남준의 ‘퍼포먼스’가 신문의 문화면을 크게 장식했는데도 고국이 그를 받아들인 것은 20년 후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도대체 아무나 첫눈에 금방 이해할 수 있는 현대 예술이란 수상쩍은 ‘키치’(가짜나 모조품)들이기 일쑤다.
스텔라의 ‘아마벨’이 쉽게 수용하지 못할 난해한 작품이란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작가의 잘못도 보는 사람의 잘못도 아니다. 그 작품이 키치가 아니고 진정한 오늘의 예술이란 데에 난해함의 원인이 있다. 현대 예술은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해 예술의 개념을 확대하고, 그럼으로써 사람의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열어 준다. 그를 따라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대서 현대 예술을 아예 ‘퇴폐예술’로 추방해 버린다? 히틀러의 제3제국이 그랬고 스탈린의 소련이 그랬다. 그러나 산업화 민주화를 다 같이 성취한 한국에서 스텔라를 추방하자고? 과천의 현대미술관이나 광양의 제철공장으로 보내 버리자고? 참으로 해괴한 논의가 한동안 시끌시끌하더니 잠잠해졌다. 이젠 괜찮아졌나 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포스코 앞을 지나다 보니 스텔라의 작품이 보이지 않도록 그 주변에 키 큰 나무들을 심어 가려 놓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비로소 감상할 수 있는 그 대형 조형물을….
이건 테헤란로에 국한된 작은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예술, 새로운 실험, 새로운 시각, 무릇 새로운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 수용성, 또는 마음의 여유에 관한 문제다. 포스코의 자랑을 포스코의 수치로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최정호 객원 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