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남 작 ‘레퀴엠’
중앙아시아의 핍박받는 고려인 수난사를 그림으로 표현해 영국 BBC방송에서 ‘아시아의 피카소’라는 극찬을 받은 고려인 1세대 신순남(사진) 화백이 최근 별세했다. 향년 78세.
우즈베키스탄 주재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 예술인 마을에 거주하던 신 화백은 18일 오전 노환으로 자택에서 영면했다.
20일 장례식에는 부인과 아들 3명 등 유족과 문하영 대사, 현지 예술인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우즈베크 공훈미술가인 고인은 타슈켄트 시내 칠란자르 묘역에 묻혔다.
1928년 연해주에서 출생한 고인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이 시행될 당시 9세의 나이에 할머니와 함께 이주 열차에 올라 참혹한 비극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우즈베키스탄 벤코프 미술학교와 아스트롭스키 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사회주의 시절 정치적 탄압의 위협 속에서도 한민족의 고통을 수십 m의 거대한 화폭에 기록했다.
첫째 며느리 이스크라 씨는 24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시아버지가 예술 활동을 할 당시 낙천적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유행이었지만 시아버지는 한민족의 고통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그런 조류에 가담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가로 44m, 세로 3m의 연작 ‘레퀴엠’. 1997년 한국에 처음 전시됐으며 이를 계기로 그의 인생 역정을 소개하는 방송 다큐멘터리가 각국에서 방영됐다. 그의 인생과 예술 세계를 취재한 영국 BBC방송은 그를 ‘아시아의 피카소’라고 극찬했다.
신 화백의 ‘고아’ ‘애도’ ‘할머니와 손녀’ ‘검은 태양에 대한 한국의 노래’ ‘부채춤’ ‘여인의 절규’도 한민족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시아버지의 뒤를 이어 타슈켄트에서 화가로 종사하고 있는 이스크라 씨는 “신 화백의 작품은 높은 수준의 상징주의를 통해 고려인들의 고뇌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인은 1997년 한국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