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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잃어버린 에너지 찾아서]기업가정신 회복하자

입력 | 2006-08-29 03:00:00

“오기로 다시 일어섰죠”안정된 공무원 신분을 버리고 중소기업 경영자로 변신한 한경희 사장(가운데). 그는 “주변에서 부동산 투자를 권하기도 하는데 그러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다”며 “사업하는 것이 정말 힘들지만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드디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노랗더군요. 살던 집을 담보로 잡히고 마련한 사업 밑천 1억 원이 완전히 바닥났거든요.” 한경희생활과학의 한경희(43) 사장은 창업 3년째인 2001년 천신만고 끝에 생산한 스팀청소기 시제품 3000대를 모조리 폐기하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 자체 시험 결과 일부 제품에서 물을 끓이는 부분이 샐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 것.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말리던 사람들 얼굴이 떠올랐죠. 오기가 생기더군요.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한 사장은 부모님을 설득해 다시 사업자금을 마련했고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교육부 사무관이라는 평탄한 길을 스스로 포기하고 1999년 사업에 뛰어든 지 7년. 그는 지금 연매출 1500억 원을 바라보는 탄탄한 기업의 경영자로 우뚝 섰다.》

○ 미래에 대한 과감한 투자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기업가 정신이 회복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LG전자가 1995년 인수한 미국 가전업체 제니스는 매년 적자를 내다 1999년 미국 법원에 파산신청이나 다름없는 기업회생 계획을 제출했다. 하지만 LG전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과감하게 구조조정을 감행하고 오히려 지분을 늘렸다. 연구개발(R&D) 기능도 더욱 강화했다.

제니스는 거짓말처럼 되살아났다. LG전자와 공동 개발한 디지털TV 전송기술이 미국을 비롯한 북미시장의 방송 표준으로 결정되면서 연간 로열티 수입만 1억 달러를 넘는 ‘대박 신화’로 돌아왔다.

현대자동차가 ‘10년, 10만 마일(약 16만 km) 품질보증’이라는 승부수를 던져 미국시장 안착에 성공한 것도 유명하다. 세계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는 자동차업체들도 이런 조건을 내건 사례가 없었다.

다들 ‘무조건 손해’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정몽구 회장은 일주일에 두 차례씩 직접 품질회의를 주재해 가며 마침내 성공했다고 회사 측은 설명한다.

○ 기업가 정신의 쇠락

그러나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한 이런 성공 사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선 일찍이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투자를 이끌어내는 힘으로 지목했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 실종됐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부친이 세운 중소기업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A(33) 이사는 회사의 성장전략을 짜준 컨설턴트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솔깃한 소릴 들었다. 그들은 A 이사에게 “솔직히 팔고 나가는 게 남는 장사”라고 충고한 것.

A 이사는 본보 취재팀에 “송도 신도시 등의 영향으로 인천의 공장 용지가 평당 300만 원에서 500만 원까지 뛰었다”며 “지금은 어떻게 하면 가장 비싸게 팔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지방에서 소규모 건설업을 하는 B(37) 사장도 고민이 많다. 창업주인 부친을 비롯해 가족들은 그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찾아낼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해답이 잘 안 보인다.

그는 “건설업 전망이 불투명해진 뒤부터 뭔가 다른 걸 찾고 있는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며 “불확실성이 기업가 정신의 실종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사례는 현재 한국의 많은 경영자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고민이다.

○ 무엇이 문제인가

경제관료 출신인 대기업의 한 임원은 기업가 정신의 실종에 대해 “한국 사회에선 기업가에게 요구하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주식을 팔고 떠나면 그만인 소액 투자자가 재산과 인생을 다 건 기업인을 감시하고, 학자들은 고용을 늘리고 기업을 얼마나 키웠는지가 아니라 경영권을 자식에게 물려주는지 여부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노동자와 정부도 가세해 기업인들이 기를 못 편다는 것.

일부에선 시대적 변화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삼성경제연구소 강원 수석연구원은 ‘한국경영 20년 회고’ 보고서에서 “급격하게 ‘글로벌 스탠더드’를 강요당하고 기업 투명성이 강조되면서 경영의 보수화가 진행됐다”고 진단했다.

단기 목표를 내세우는 주주 중심 경영이 확산되면서 미래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기업가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철용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이 투자를 안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라며 “사업을 해서 매출의 20% 이상 순이익을 낼 자신이 있다면 누가 투자를 안 하겠느냐”고 지적했다.

○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기업가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99%의 실패 가능성보다 1%의 성공 가능성을 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광복 직후 현대자동차공업 시절 건설업자가 훨씬 큰돈을 번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현대토건(현대건설의 전신)을 차릴 때도, ‘철판을 잘라 잇는 게 뭐가 어려우냐’며 현대중공업을 세울 때도 다들 말렸다. 하지만 뚝심 있게 밀어붙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기업가 정신의 핵심이라는 데 이의는 없다. 하지만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는 사회제도와 시스템도 중요하다.

지난해 정부에서 야심 차게 추진했던 ‘벤처 패자부활제’는 실패한 기업인의 회생을 돕기 위해 마련됐지만 1년 넘게 헛돌고 있다.

벤처기업협회 오완진 정책홍보팀장은 “망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치고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는데 정부에서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성 기준을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기업가 정신 1970년대 활발…대표 경영자는 정주영 회장”

국내 기업인들은 1970년대를 한국에서 기업가 정신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꼽았다. 또 기업인 10명 가운데 9명은 현재 투자가 위축돼 있다고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보 취재팀이 이번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국내 기업인 161명을 대상으로 ‘한국의 기업가 정신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절반이 넘는 83명(51.6%)이 국가 주도의 성장 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기업가 정신이 가장 활발했다고 응답했다.

1980년대가 39명(24.2%), 1990년대가 19명(11.8%)으로 뒤를 이었다. 이번 조사는 25∼28일 나흘간 대기업 임원급 및 중소기업 대표 등 국내 기업인에게 e메일을 보내 이뤄졌다.

‘한국의 기업가 정신을 대표하는 경영자’로는 63명(39.1%)이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를 꼽았다.

이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31명·19.2%)과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22명·13.7%)를 기업가 정신의 ‘표상’으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라는 답도 각각 16명(9.9%), 7명(4.3%) 나왔다.

현재 한국의 전반적인 투자 수준에 대해선 ‘매우 위축돼 있다’가 71명(44.1%), ‘위축돼 있다’가 73명(45.3%)이었다. 투자가 부진한 이유로는 △정책 불확실성(102명) △사업기회 부재(28명) △자금조달 어려움(7명) △인력 문제(5명) 등을 꼽았다.

박중현 기자(팀장) sanjuck@donga.com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