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테라스 거리’ 오후 풍경. 유럽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명품관 에비뉴엘에 있는 퓨전 일식 레스토랑 ‘타니’의 테라스 야경.
서울신라호텔 ‘더 파크뷰 테라스’에서 점심파티를 열고 있는 여성들.
삼청각 일화당 2층의 테라스 레스토랑 ‘다소니’. 테라스에서 차와 식사를 즐기며 계절마다 달라지는 북악산 경치와 서울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와∼.’
지난달 24일 오후 5시경 경기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테라스 거리’를 찾은 회사원 이창열(40)씨는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안정길’로 불리는 이곳 4차로 도로 양옆에는 테라스가 300m가량 늘어서 있다.
정말 예쁘고 아담했다. 테라스 안에 자리 잡은 테이블,벤치,화분,꽃,난로,가로등….
투박한 미국 스타일도 있지만 대부분 유럽풍으로 고풍스럽다.
해외출장 때 잠깐 들렀던 파리의 센 강변,로마의 스페인 광장,런던 코벤트가든 거리의 테라스 카페가 떠올랐다.
“아무 집에나 들어가 테라스에서 카푸치노를 마시면 거리의 악사와 행위 예술가,초상화 화가가 갑자기 튀어날올 것만 같았다.”》
○ 테라스 광풍(狂風)
테라스 신드롬이 일고 있다. 손님이 북적대는 카페와 레스토랑에는 여지없이 테라스가 생기고 있다.
트렌드 세터(trend setter)들이 찾는 동네에서 개업을 준비하거나 리모델링을 하는 업소는 아무리 공간이 좁아도 테라스를 만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테라스를 고집하는 마니아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업소의 성패는 커피나 음식 맛, 내부 인테리어가 아니라 테라스를 어떻게 꾸미는가에 좌우된다.
테라스 거리에서 커피전문점 ‘디오니스’를 운영하는 이화숙(45·여) 씨는 “지난해 겨울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담요를 덮어쓰고 스토브 옆에서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커피를 마시는 손님들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디오니스 바로 옆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 ‘알리오’의 유진철(35) 총본부장은 “한여름에도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실내보다 테라스를 선호하는 손님이 많다”고 귀띔했다
○레스토랑에 찜질방까지
분당 정자동 만큼은 아니지만 테라스 열풍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과 신사동의 도산공원 일대, 강북의 홍익대 인근과 여의도….
테라스 신드롬은 카페나 레스토랑에 머물지 않는다.
서울 신라호텔은 5월 새 단장을 하면서 ‘더 파크뷰 테라스’란 공간을 만들었다. 호텔이 운영하는 도곡동 타워팰리스의 ‘아티제 카페&베이커리’에서 손님들이 노천 테라스를 선호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호텔 측은 “상당수 테라스 카페가 차도 옆에 있는 것에 비해 ‘더 파크뷰 테라스’는 남산에 자리 잡아 자연경관을 100% 즐길 수 있어 반응이 좋다”고 설명했다.
한국 전통문화 공간으로 유명한 삼청각도 지난해 8월 위탁 운영자가 파라다이스그룹으로 바뀌면서 2층 라운지에 테라스 레스토랑 ‘다소니’(순우리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를 열었다. 7개의 테이블에서 30여 명이 북악산 경치를 보면서 식사와 음료를 즐길 수 있다.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을 만끽할 수 있다.
일산의 스트리트형 쇼핑몰 ‘라페스타’는 벤치가 있는 테라스를 만들어 시민들이 공원처럼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명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찜질방에도 테라스가 들어섰다. 광진구 자양동의 ‘해피데이’ 찜질방은 옥상에 테라스 스파를 만들었다. 테라스에서 야경을 즐기면서 노천탕에서 피로를 풀 수 있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종로구 부암동의 ‘몽고 맥반석 하림각’은 테라스 바닥에 파란 잔디를 깔아 일광욕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홍릉근린공원 안에 있는 정보화도서관은 뒷마당과 각 층에 테라스를 마련했다.
○테라스거리로 집값도 올라
테라스는 ‘평범한 동네’였던 정자동을 ‘분당의 청담동’ ‘분당의 베벌리힐스’로 바꿔 놓았다. 부동산 값을 올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테라스가 한두 집씩 들어선 2004년 봄부터 2005년 초까지 평당 800만 원대에 머물던 아파트 시세가 테라스 거리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뒤 크게 올랐다.
어느 정도 테라스 거리의 모양새를 갖춘 2005년 여름 아파트 값은 평당 1150만∼1200만원으로 뛰었다. 당시 분당에서 최고 시세를 자랑했던 유명 단지 아파트 값과 맞먹는 가격이었다. 테라스 거리가 자리를 잡은 현재 시세는 평당 2200만 원 선.
상가 시세도 급등했다. 1년 전만 해도 미미했던 유동 인구가 평일 5000∼1만 명, 주말 2만∼3만 명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입소문을 듣고 서울, 수원 등 외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온 것이다.
부동산업소를 운영하는 이난영(41·여) 씨는 “테라스 거리가 들어선 것 말고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면서 “테라스가 (집값 상승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상가 주인과 아파트 입주민들의 갈등도 없어졌다. 과거 입주민들은 상가의 인테리어와 간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상가 앞에서 주민 수십 명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테라스 효과를 본 뒤로 양측의 대립은 싹 사라졌다.
21세기 들어 테라스는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국가의 전유물에서 벗어났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싱가포르, 한국에서 테라스 바람이 거세다.
중국 상하이(上海)의 신톈디(新天地)에는 테라스가 갖춰진 노천카페들이 상하이 멋쟁이들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는데 성공했다.
싱가포르의 대표 관광지인 클라크키와 파이스트(Far East) 파크웨이 롱비치의 노천 테라스 카페도 테라스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특히 클라크키 강변에 있는 테라스 카페와 시푸드(seafood) 레스토랑들은 1년 내내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다.
○왜 테라스인가
테라스가 도시의 문화 아이콘으로 각광받게 된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테라스는 그 자체로 행인의 눈길을 끈다. 짙은 갈색의 목조 바닥, 하얀 철제 울타리, 단풍나무…. 하지만 이것만으로 열풍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영어학원 강사 김성은(29·여) 씨는 “바람이 기분 좋게 부는 야외에 앉아 시원한 공기와 차를 마시며 하늘을 보면 스트레스가 절로 풀린다”고 ‘테라스 예찬론’을 폈다. 치열한 경쟁과 과도한 업무에 얽매여 누리지 못했던 여유를 잠시나마 만끽하고 싶어 테라스를 찾는다는 얘기다.
사방이 꽉 막힌 도심 속에서 사는 현대인이 햇볕과 달빛, 바람을 직접 마주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테라스다. 조선시대의 정자나 마루처럼.
실내에 비해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맘껏 떠들 수 있는 것도 테라스의 장점이다. 주부 송미진(35) 씨는 “친구들과 마음 놓고 수다를 떨고 싶을 때 테라스가 있는 카페를 찾는다”고 말했다.
금연 열풍으로 어디가나 찬밥 신세인 애연가들에게도 테라스는 숨통을 틔워 주는 소중한 공간이다. 하루에 담배를 두 갑 정도 피우는 회사원 이윤세(37) 씨는 “차를 마시고 식사하면서 남의 눈치 안 보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테라스는 흡연자들에게 천국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해외여행과 어학연수, 유학, 출장 등을 통해 유럽풍의 테라스를 경험한 사람이 급증한 것도 요인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아련한 기억 속의 향수를 현실에서 느끼고 싶어 테라스 카페의 단골손님이 되기 때문이다.
건축디자인연구소 ‘소로’의 오수환(37) 실장은 테라스가 손님에게 ‘특별한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자동 ‘테라스 거리’를 최초 설계한 오 실장은 한국의 테라스가 길 위에 테이블 몇 개와 의자를 달랑 놓은 유럽의 테라스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는 “원목으로 만든 데크(바닥)와 펜스(울타리)가 거리를 걷거나 차에 타고 있는 사람과 테라스 안에 있는 사람을 완벽히 갈라 놓는다”고 말했다. 남에게 방해받기 싫어하는 현대인의 욕구를 만족시키면서 테라스 바깥에 있는 불특정 다수와는 다르다는 ‘존재감’을 심어 준다는 것이다.
글=이호갑 기자 gdt@donga.com
사진=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