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출신의 귀화인 서민수 씨와 한국인 아내 이지형 씨가 활짝 웃고 있다. 2000년 5월 결혼한 이들 부부는 한 달 전 문을 연 인도네팔요리전문점 ‘두르가’에서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원대연 기자
《네팔 출신으로 한국인 아내 이지형(33) 씨와 단란한 가정을 꾸린 서민수(35)씨.히말라야 산맥의 관문 ‘망티’가 고향인 그의 본명은 ‘비노드 쿤워’지만 지금은 엄연한 ‘한양 서씨’ 시조다. “남편이 급하고 조바심 내는 성격이거든요 천천히, 평온하게 살라는 뜻에서 ‘서(徐)’씨 성을 붙여 줬어요.”(이지형 씨) 서 씨는 한국인 아내와 결혼한 뒤 한국 거주기간 2년을 채우고 성과 이름을 차례로 바꾸고서야 두 아이의 이름을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 한국의 평범한 여성과 네팔 출신 노동자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통해 일궈낸 ‘작은 성공’ 이야기를 들어 봤다.》
○ ‘네팔 남편’과 ‘한국 아내’의 인도네팔음식점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 출구에서 세종로 쪽으로 50m쯤 걸어가면 ‘두르가(Durga)’라는 작은 간판이 보인다. 새로 단장한 듯 산뜻한 느낌의 3층짜리 건물 두 번째 층. 네팔 남편과 한국 아내가 한 달 전 문을 연 인도네팔요리전문점이다.
레스토랑 실내는 한국 시골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황토색으로 칠해져 있다. 네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고 한다. 벽 곳곳에는 힌두교 신 조각과 네팔 전통 악기로 한껏 멋을 냈다.
‘두르가’는 팔이 10개 달린 힌두교 여신의 하나. 관대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속성을 지닌 동시에 에로틱하면서 잔인하기도 한 ‘모순의 신’이라고 서 씨는 설명했다.
“처음에는 인도의 호텔과 사원 등에서 흔히 쓰이는 ‘사하라’라는 이름으로 개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하라’라고 하면 한국인들은 사막 이미지를 떠올려 인도네팔 음식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두르가’로 바꿨죠.”
요즘 인기 있는 ‘인도음식점’이 아니라 굳이 ‘인도네팔음식점’을 표방한 것도 서 씨의 아이디어다. “제가 네팔 출신이니 네팔 요리도 선보여야죠. 사실 인도 요리와 네팔 요리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경상도와 전라도 음식 정도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네팔 음식이 향신료를 좀 덜 쓰는 정도입니다.”
히말라야 지역 등 네팔을 다녀온 한국인 손님들이 찾아와 네팔 요리를 주문할 때도 있다. 그러면 이들에게는 구리로 만든 네팔 그릇에 카레 등 전통음식이 담긴 ‘탈리세트’를 낸다.
○ 외환위기가 맺어준 인연
서 씨가 한국에 온 것은 1992년, 스물한 살 때다. 당시 네팔에서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경기도 의정부시의 한 공장에 일자리를 잡은 그는 1997년 외환위기로 직장을 잃었다. 일거리를 찾으려고 친구가 사는 수원시에서 잠시 머물다 지금의 아내 이 씨를 처음 만났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함께 식사할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이 ‘ㄱ’ ‘ㄴ’이 적힌 누런 종이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참 열심히 사는구나’라고 생각했지요.”(아내)
‘어떻게 결혼까지 했느냐’는 질문에 부부는 “사연이 많아 일일이 설명하려면 복잡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밥 먹다 정 들었다’는 네팔 남자와 한국 여자는 2000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홀어머니가 결혼에 반대했지만 ‘우리는 아직 젊고, 그 사람은 세상 누구보다도 성실하다’고 설득해 허락을 받았습니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더군요.”(아내)
결혼 후 서 씨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개인적으로 무역업에도 뛰어든 남편을 보다 못해 이 씨는 아이를 들쳐 업은 채 무역 서류를 챙겨 뛰었다. 한국 사정에 서툰 남편인지라 ‘비서’ 역할은 늘 아내의 몫이었다.
서 씨는 한국산 스웨터와 모자, 가방 등을 네팔에 팔아 돈이 모이자 식료품점을 열었고 이번에 음식점까지 개업했다. “욕심이 앞서 이것저것 많이 손댔습니다. 제가 일을 벌이면 아내가 챙기는 식이었죠. 뒤치다꺼리하느라 정신없이 살아온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뿐입니다.”
○ 네팔인 ‘상담사’
서 씨는 국내에 거주하는 네팔인들 사이에 ‘상담사’ 혹은 ‘해결사’로 통한다. 그가 운영하는 음식점에는 고민거리를 안고 상담하러 오는 네팔인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말이 안 통해 병원에 못 가는 동포의 통역을 맡는가 하면 술에 취해 집을 못 찾아 경찰서에 있는 네팔인의 보호자 역할도 서슴지 않는다. 형편이 어려운 네팔 출신 근로자들을 돕기 위해 각종 모임에서 모금 활동도 벌이고 있다.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도 최소한 받은 만큼은 나눠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맨손으로 시작한 서 씨는 이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의류공장을 차려 현지 친척들을 돌볼 만큼 사정이 좋아졌다. 한국에서도 의정부와 종로 두 곳의 음식점 사장이다.
‘이 정도면 성공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아내가 “아직 성공은 아니다”며 “음식점이 자리를 잡으면 또 다른 일을 찾아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처음 한국을 찾았을 때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앞으로 더 좋은 일이 있을지 나쁜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해온 대로 열심히 살 생각”이라고 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