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캉스 시즌이 끝나면서 파리의 유명 백화점은 다시 파리지앵들로 붐비고 있다. 부유층 고객들이 자주 찾는 백화점으로 알려진 ‘봉 마르셰’. 사진 제공 김현진 사외기자
파리에는 진작부터 가을이 찾아왔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가 하면 사흘 걸러 한번씩 비를 뿌리는 전형적인 파리의 가을 날씨도 본색을 찾아가고 있다.
길기로 유명한 프랑스인들의 바캉스가 끝나고 다들 일상으로 돌아오는 시기다. 바캉스 기간 중 외국 관광객들로 붐볐던 시내 유명 백화점은 다시 파리지앵들로 가득 차고 있다.
파리 토박이, 그중에서도 멋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백화점으로 꼽히는 곳은 파리 6구의 ‘봉 마르셰’다. 백화점 인근에 부자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부르주아 백화점’으로 불린다. 1852년 세워진 세계 최초의 백화점으로 충동구매, 윈도쇼핑, 여름세일 등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쇼핑 패턴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일찍 찾아온 가을에 놀라 쇼핑 채비를 서두르는 파리지앵들. 봉 마르셰에 들러 그들의 쇼핑 카드에 담기는 것은 뭔지 살짝 들여다봤다.
봉 마르셰에는 프랑스의 다른 백화점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발레파킹 서비스가 있다. 2시간에 8유로로 인근 지하 주차장에 직접 차를 대는 것보다는 비싸지만 여성 고객들이 즐겨 이용한다.
일본어 억양이 강하지만 전형적인 파리지앵 패션을 한 일본인 중년 여성,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신 유행에 맞는 스타일로 차려 입은 앳된 얼굴의 두 프랑스 여성, 무릎까지 오는 흰 모피에 빨간 립스틱을 칠한 노년 여성과 그의 요크셔테리어 강아지 등이 차례차례 발레파킹 스태프의 환영을 받았다.
가장 먼저 찾은 식료품 매장은 세계 각지에서 온 향신료와 식재료, 다과 등을 파는 일종의 대형 슈퍼마켓이다. 쌀쌀한 계절에 어울려서인지 각종 차와 초콜릿 음료, 커피 등이 전진 배치됐다. 이 중 프랑스 브랜드 ‘커스미티(Kusmi Tea)’는 최근 고급 차로 주가를 올리고 있다. ‘프린스 블라미르’ ‘아나스타샤’ 등의 이름을 단 러시아산 차 세트도 인기리에 팔린다.
식료품 매장을 뒤로 하고 20, 30대가 좋아할 만한 패션 브랜드가 모여 있는 2층 매장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폴 앤 조’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 ‘아테 드 바네사 브루노’ ‘콤투아 데 코토니에’ 등 디자이너들의 캐주얼한 스타일이 주가 되는 브랜드들이 배치돼 있다. 폴 앤 조는 1970년대 서유럽의 농촌에서 입었을 법한 ‘촌티패션’이 연상되는 갈색 톤의 의상을,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는 무릎 바로 위에 바지선이 닿는 크롭트 팬츠와 이에 어울리는 흰 블라우스 등을 내놓았다. 크롭트 팬츠와 몸에 달라붙게 입는 검은색 판탈롱은 다른 브랜드들에서도 눈에 많이 띄는 아이템이다.
조금만 더 발걸음을 옮기면 ‘세븐 포 맨카인드’나 ‘디젤’처럼 젊은 층이 좋아하는 진 브랜드가 모여 있다. 이 코너 가운데 있는 ‘보디메트릭스’라는 이름의 커다란 흰색 기계는 살색 속옷으로 갈아입은 고객의 몸을 5초 만에 ‘스캔’해 약 500군데의 치수를 순식간에 잰다고 선전한다. 몸에 꼭 맞는 청바지를 만들어 준다는 것. 호기심 많은 젊은 여성들이 최근 유행하는 ‘몸에 꼭 맞는 일자 청바지’를 구입하겠다며 담당 직원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옆 건물 패션관에는 ‘마르니’ ‘자크 포센’ ‘클로에’ 등 최근 트렌드 세터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브랜드가 대거 포진했다. 1980년대를 연상시키는 넉넉한 품의 상의와 크롭트 팬츠가 이곳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폴 스미스’는 목 부분에 우아한 리본이 달린 땡땡이 무늬의 시폰 블라우스를 다양한 색상으로 내놓았다. 리본이 달려 있고 로맨틱한 느낌의 새틴과 시폰 소재 블라우스는 자라, 망고 등 패스트 패션 브랜드에서도 많이 모방 디자인됐다.
독특한 디스플레이가 돋보이는 ‘마르니’ 매장에서는 7푼 소매에 커다란 단추가 달린 짙은 색 하프 코트를 만지작거리는 고객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만난 패션 스타일리스트 클레어 미쇼(29) 씨는 “오늘은 짙은 색에 심플한 디자인의 가방과 검정 레깅스, 빨간색 티셔츠를 사러 왔다”며 “기모노 풍으로 품이 넉넉하고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블라우스에도 관심이 간다”고 말했다.
아래층 액세서리 매장은 여름보다 한결 다양해진 브랜드와 독특한 개성의 상품으로 가득찼다. 커다란 플라스틱 액세서리를 연결하거나 여러 가지 크기와 색상의 플라스틱 구슬을 꿴 디자인에 시선이 쏠렸다.
지하의 학용품 매장은 신학기를 맞는 학부모와 어린이들로 붐볐다. 특히 한국 브랜드 ‘뿌까’ 캐릭터 학용품이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파리지앵들이 가을 패션에서 ‘화룡점정’으로 꼽는 것은 모자다. 이번 시즌에는 전형적인 베레모에 알록달록한 단추와 장식이 달려 있거나 흰색 토끼털로 만든 모자가 많은 파리지앵들의 머리에 ‘날개’를 달아줄 듯하다.
오후 8시. 폐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파리지앵들의 발길은 여전히 빠르게 움직였다.
파리=김현진 사외기자 kimhyunjin517@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