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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산책]before&after… ‘해변의 여인’

입력 | 2006-09-01 02:59:00

홍상수가 변한 걸까? ‘섹스 전’보다 ‘섹스 후’ 여성이 느끼는 복잡한 심경 속으로 들어가는 홍 감독의 신작 ‘해변의 여인’. 영화는 영화감독 중래(왼쪽)와 미술감독 창욱(오른쪽), 그리고 창욱의 애인 문숙(가운데)이 만드는 묘한 삼각애정으로 시작된다. 사진 제공 영화사봄


먼저 홍상수 감독의 팬에게. ‘해변의 여인’은 그의 영화 중 가장 쉽고, 가장 웃긴다. 또 가장 쓸쓸하고, 가장 속 깊다. 미세성형수술을 하고 다시 나타난 애인을 만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어쩔 수 없는 홍상수 영화인 동시에 어딘가 다른 홍상수 영화다.

다음은 고현정 팬에게. 지난해 TV 드라마(‘봄날’)로 10년 만에 컴백했지만 그녀의 연기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스크린 데뷔작인 이 영화로 그녀는 과거의 기량(몸매는 아직 모르겠다)을 완전 회복했다. 아니, 그녀의 연기에는 인생의 자질구레한 경험들까지가 퇴적물처럼 쌓여 있다. 그건 그냥 ‘재주’로 때울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현정이 주는 거 없이 얄미운 여성들에게. 이 영화에서 고현정은 여전히 예쁜 체, 순진한 체, 귀여운 체한다. 하지만 “(내 얼굴이) 좀 크죠? 잘라내야 하는데…”하면서 멍청한 체, 쉬운 체, 찐득찐득한 체도 한다. 바람둥이의 꾐에 넘어가 하룻밤 자고 난 뒤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평민스러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묘한 승리감도 있다.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던 영화감독 중래(김승우). 그는 미술감독 창욱(김태우)과 창욱의 애인 문숙(고현정)을 데리고 서해안으로 여행을 떠난다. 아니나 다를까. 중래는 창욱 몰래 문숙과 관계를 맺는다. 창욱과 문숙이 서울로 올라간다. 중래는 우연히 바람 쐬러 온 선희(송선미)와 마주친다. “아는 여자랑 너무 닮았다”는 중래에게 넘어간 선희는 중래와 침대로 들고, 바로 그 순간 술에 취한 문숙이 중래의 방문을 맹렬하게 두드린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도 그렇지만 이번 영화는 특히 수학적 관심을 갖고 바라볼 때 매력만점이다.

①전제=공간은 반복되고, 시간은 달라진다. ②남자(A)가 아는 남자(B)를 따돌리고 B의 여자(C)와 섹스한다. ③A는 이번엔 C를 따돌리고 또 다른 여자(C´)와 섹스한다. ④A는 C와 C´가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객은 C와 C´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⑤급기야 C와 C´가 만나 긴장감이 감돌지만 결국 둘은 서로가 진정 비슷하다는 걸 깨닫는다. ⑥여기에 ‘섹스하기 전(before)’과 ‘섹스한 후(after)'라는 두 개의 상황이 추가돼 A, B. C, C´의 관계는 복잡한 함수관계로 발전한다. ⑦결론=이런 같음과 차이, 반복과 대칭의 함수관계 속에서 ‘인간’ 자체가 드러난다….

홍상수의 일곱 번째 영화 ‘해변의 여인’이 기존 홍상수 영화들과 다른 중요한 지점은 ‘섹스 전(before)’이 아닌 ‘섹스 후(after)’ 상황에 대한 감독의 묘사와 사색이 한층 넓고 깊어졌다는 데 있다. 섹스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섹스 후엔 인생이 도대체 어떤 모양이 될 것이냐를 두고 농담 같은 진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간 홍상수 영화를 지배해 온 수컷 중심의 시각, 즉 ‘섹스=번식’이라는 등식은 이제 ‘섹스=관계’란 암컷 시각의 등식으로 치환된다. 나무에다 대고 문득 ‘구원’의 큰절을 올리는 중래와 몽유병 환자처럼 풀숲을 헤매면서 왠지 ‘치유’의 뒷모습을 보이는 문숙의 모습에선, 여자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면 ‘자거나 말거나’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숨어있다는 걸 말하고픈 홍상수의 변화가 보인다.

섹스 뒤 사무치는 쓸쓸함. 이제 홍상수 영화에서 남자와 여자의 거리가 소멸되고 있다. 31일 개봉. 15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고현정 김승우의 영화 ‘해변의 여인’ 시사회 현장

‘해변의 여인’ 고현정 ‘폭탄 머리’ 파격 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