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전 세계에 10억 명 이상의 인구가 자동차나 트럭으로 통행하고 있다. 매 순간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공중에 떠 있다. 40년 내에 매년 30억 명 이상이 비행기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매 순간 1000만 명 이상이 수십만 대의 비행기 안에 있게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1980년대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이 몰려오고 있음’을 예고하였고 1990년대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이 종말을 맞이하고 있음’을 경고했다. 200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자크 아탈리는 ‘인류의 노마드(Nomad·유목민)화’를 예고했다. 정보화 사회는 이제 진부한 개념이 되었으며 산업 현장에서 노동이 대거 축출되고 있는 현상은 우리의 현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인류의 노마드화 역시 조만간 다가올 우리의 미래인가?
‘30억 명 이상의 인류가 일상적으로 비행기를 타는 40년 후의 미래’는 무엇을 의미할까. 아침엔 베이징에서 식사를 하고 점심때는 바그다드에서 일하며 저녁엔 파리에서 오페라를 감상하는 하루. 중요한 것은 이 하루가 최고경영자(CEO)의 일정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일상이 될 것이라는 예견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처럼 동가식서가숙, 정처 없이 방황하며 유랑하는 것이 역마살이 낀 불우한 인간의 역정이 아니라 500만 년 동안 유전자 속에 내장되어 내려온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유랑하는 인간, 호모 노마드. 아탈리는 노마드적 삶이 인간의 특수한 생존 양식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삶의 양식임을 환기시킨다. 인류 문명의 핵심적 요소라 일컫는 불과 언어, 옷과 신발, 음악과 예술, 심지어 종교와 민주주의마저 정착인이 아닌 유목인의 산물이었음을 아탈리는 자랑스럽게 제시한다. 이쯤 되면 독자들의 마음속엔 의심의 연기가 피어오를 것이다. ‘어, 정착인의 삶의 양식이 일시적인 것이라고?’
노마드는 머물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마드는 소유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미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노마드는 정주의 편안함을 버리고 자유의 불편을 택한다. 모험은 고난이다. 그러나 고난을 이겨 내는 그 어느 변곡점에서 위대한 창의가 실현된다. 그러므로 인류의 모든 위대한 창조는 정주인의 것이 아니라 노마드의 것이며 노마드는 창조적 인간형, 자유인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아탈리는 팍스아메리카나의 우울한 미래를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아탈리는 팍스아메리카나를 부정할 세력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미국 밖의 자본이요, 다른 하나는 이슬람과 같은 근본주의 종교요, 다른 하나는 유럽공동체의 확대판인 세계 국가이다. 그는 확언한다. “노마드적인 이 세 권력은 언젠가 미 제국을 이기고야 말 것이다.”
그의 마음은 아름다우나 그의 논증은 미약하다. 미국의 몰락을 시사하는 현상들은 널려 있지만 미국 중심의 세계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세계화, 새로운 문명은 어디에 있는가! 모세의 민중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찾기까지 40년의 세월을 사막에서 방황했듯이 우리는 더 방황해야 할 것 같다. 아탈리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호모 노마드라는 개념의 집에 너무 정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황광우 광주 다산학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