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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87년 호네커 서기장, 서독 방문

입력 | 2006-09-07 03:01:00


‘한마디로 독일이 부럽다.’

동아일보 1987년 9월 9일자 사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베를린장벽을 넘어 서독 땅을 밟은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서기장이 서독 수뇌들과 만나 ‘우리는 한 민족’임을 확인하면서 악수하는 장면을 멀리서 지켜보는 우리의 심정은 그저 부럽다는 말로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호네커 서기장이 이틀 전인 9월 7일 동독 국가원수로서는 최초로, 동서 분단 38년 만에 서독의 본을 방문한 것이다. 이 사설은 그 성과를 평가하면서 한반도의 현실에 한숨지었다.

“우리(남한) 측의 남북외무장관회담 제의는 미국을 포함한 3자 외무차관회담 제안으로 되돌아오더니 지금은 그마저 거부된 상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남북 간에 이런 제안과 역(逆)제안 그리고 수정 제의만을 주고받고 있을 것인가.”

2000년 한반도에서도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지만 19년 전 독일에 대한 부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북한의 실질적 국가원수는 6·15남북공동선언의 서울 답방 약속을 7년째 외면하고 있으나 호네커는 당시 서독 방문을 통해 동독의 외교적 고립을 극복하려 했다. 독일 언론들이 “동베를린(동독의 수도)에 제정된 128명의 각국 대사 신임장보다도 서독 본의 하늘 아래 동독 국기가 게양되었다는 것이 더 큰 외교적 무게를 갖는다”고 평가했을 정도.

또 한반도에서는 대체로 남한 정부가 아쉬운 표정을 짓지만 서독은 꼭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호네커의 카운터파트였던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의 회고.

“동서독 간 국경의 문을 더 활짝 열기 위해 나는 (그동안 반대하던) 호네커의 서독 방문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서독)는 양 지도부의 연설이 동서독 국민에게 다같이 생중계되지 않으면 그의 방문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 줬다.”

이에 동독 측은 “방문을 포기하면 했지 생중계는 안 된다”고 맞서다가 서독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결국 생중계를 허용했다.

당시 콜은 정상회담에서도 “동독의 인권 상황이 개선돼야 한다. 베를린장벽에서 무력이 사용돼서는 안 된다”며 호네커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호네커는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장벽을 기획했다는 이유로 당시 ‘벽돌공’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반도 상황으로 치면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의 탈북자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한 셈이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