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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방형남]노-부시, ‘맨얼굴’을 보여라

입력 | 2006-09-13 21:03:00


10%대와 30%대의 지지율. 미국 시간으로 오늘 워싱턴에서 만나는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초라한 성적표다. 국내 지지율로만 보면 낙제생들의 정상회담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결과에 대한 예상 또한 차갑기만 하다. 한미 양국의 여러 전문가들은 신통한 성과가 없을 것이라고 김을 뺀다. 청와대도 합의문건을 내지 않는다며 썰렁한 결말을 예고했다.

노 대통령부터 별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초미의 관심사인 북한 미사일에 대해 불쑥 “무력적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속내를 드러냈으니 사흘 전 9·11테러 5주년을 기념하며 외부의 위협에 대한 적대감으로 충만해진 부시 대통령과 의기투합하기는 글렀다.

한미 양국 대통령에게 이번 정상회담은 6번째 만남이다. 낯을 가릴 단계는 지났다. 상대방에 대한 탐색으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국가원수로서의 경험도 충분하다.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 생활은 올해로 6년째, 노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3년 반이 지났다. 이번이야말로 모든 여건이 무르익은 회담이다. 두 사람 모두 당당하게 ‘마이 웨이’를 외칠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래서 한 가지 기대를 걸어본다. 어차피 주요 현안을 매듭짓지 못할 것이라면, 얼굴 붉히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는 대신 의견 차이를 정확하게 확인하는 회담이 되었으면 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양국 대통령에게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은 넘어설 수 없는 벽이다. 자국민도 설득하지 못하는데 어찌 타국 대통령을 변하게 한단 말인가.

이번 회담의 의제가 될 전시작전통제권 문제만 해도 노 대통령은 국내 지지기반을 심각하게 상실했다. 조기 환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그야말로 전국을 흔들고 있다. 왕조시대 초야에 묻혀 학문연마에 몰두하던 선비들이 한양으로 몰려가 “상감마마, 통촉하시옵소서”라고 외치는 게 아니다(그때도 왕들은 경청했지만). 외교 안보 분야의 주역이었던 전문가들이 줄줄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많은 국민의 우국충정을 일고(一考)도 하지 않는 대통령이 무슨 재주로 외국 지도자의 신뢰를 얻겠는가. 참여정부를 자임하고, 코드에 맞는 책 한 권 쓴 사람까지 발탁해 청와대에 없던 자리를 마련해 주던 대통령은 어디로 갔는가.

둘째, 섣부른 합의는 정권이 바뀌면 곧바로 휴지가 되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첫 번째 대선에서 승리한 뒤 ‘ABC(Anything But Clinton) 노선’을 견지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편 정책은 모두 배척하고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미국의 대북정책도 강경해졌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머지않아 미국에서 ‘ABB(Anything But Bush)’, 한국에서 ‘ABR(Anything But Roh)’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곧 사라질 ‘위장된 성공’보다는 새로운 출발의 계기가 되는 ‘솔직한 실패’가 낫다는 얘기다. 그런 다음에 두 사람 모두 심각하게 고민하면 된다. 왜 이렇게 꼬였는지, 해법은 무엇인지…. 길은 있다.

클린턴 정부 말기 미국과 북한은 30억 달러에 북한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막판 협상을 벌이는 단계까지 갔다. 30억 달러(약 2조9000억 원)는 미국에는 물론 한국 정부의 씀씀이 수준에도 큰돈이 아니다. 현 정부 출범 3년 만에 벌써 대북지원으로 3조 원이 넘는 돈을 썼다. 부시가 ABC를 택하지 않았거나, 한국 정부가 지혜로워 그 돈을 미사일 문제 해결에 쏟았다면 지금쯤 북한의 대포동은 과거사가 돼 있지 않았을까.

한미 양국 정상이 이번에는 분칠하지 않은 상대방의 ‘맨얼굴’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