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독일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읽었다. 마침 식물 뿌리 주위에 사는 세균이 향기(휘발성 물질)를 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연구를 하던 참이었다. 이 향기를 식물이 인식하면 잘 자란다는 결과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다.
심사위원 로시 교수는 내 논문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졸업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세균이 숨을 쉬면서 내놓는 이산화탄소를 식물이 광합성에 이용하기 때문에 잘 자라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일리가 있었다.
연구실로 돌아와 미국 텍사스텍대 파레 교수의 도움을 얻어 6개월간의 실험 끝에 세균에서 휘발성 물질을 직접 분리했다. ‘부탄디올’이라는 물질이었다. 이것이 식물의 생장을 촉진하는 직접적인 요인이라는 것을 밝혔다.
로시 교수를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균이 어떤 경로로 부탄디올을 만들어내는지를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미생물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 순간 앞이 캄캄해졌다. 수많은 논문을 읽었다. 드디어 내가 연구한 것과 같은 종의 세균이 부탄디올을 생산하는 과정을 밝힌 논문을 찾았다. 하지만 이걸로 로시 교수가 만족할 리 없었다.
나는 부탄디올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세균을 구해 실험을 해봤다. 예상은 적중했다. 이 세균은 식물 생장을 촉진시키지 못했던 것. 드디어 됐구나 싶었다.
하지만 로시 교수는 식물이 세균이 만든 향기 성분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증거를 요구했다. 식물생리학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면 풀기 힘든 수수께끼임을 알아차렸다. 이제 나도 질 수 없다는 오기마저 생겼다. 밤을 새워 식물생리학 교과서와 논문을 뒤졌다.
식물에는 사람의 코에 해당하는 냄새 수용체가 있다. 이 수용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돌연변이 식물을 구했다. 그리고 이 식물은 향기 성분을 인식하지 못해 생장이 빨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당당하게 웃으며 논문에 사인을 받으러 갔다. 내 웃음에 답하던 로시 교수의 미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류충민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시스템미생물연구센터 선임연구원 cmryu@kribb.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