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9월 19일자 미국 뉴욕의 주요 일간지에는 흥미로운 사진이 실렸다.
조선 최초의 방미 사절단인 조선보빙사(朝鮮報聘使) 일행이 18일 뉴욕 피프스 애버뉴 호텔에서 열린 국서(신임장) 제정식장에서 미국의 체스터 아서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리는 사진이었다. 아서 대통령은 사모관대를 한 이방인들의 갑작스러운 큰절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당시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조선보빙사 일행은 미국 대통령을 향해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이마에 손을 올려 무릎을 꿇고 큰절을 했다. 국왕에게 큰절을 할 때는 정면으로 하지 않고 옆으로 비스듬히 큰절을 하는 것과 똑같이 외국 국가원수에게도 최고의 예의를 표시한 것이었다.
조선보빙사는 1882년 구미열강 중 최초로 미국과 수교한 조선이 처음 파견했던 방미 사절단이었다. 이들은 워싱턴과 뉴욕, 보스턴 등지에서 미국 연방정부와 각국 공사관을 예방하고 선진문물을 시찰했다. 사절단 중 유길준은 귀국하지 않고 양복을 입고 단발을 한 채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조선보빙사의 파견은 조선의 대미(對美)관의 전환을 가져온 중대한 사건이었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조선의 대미 적대감정은 최절정에 이르렀다. 조정에선 미국인을 견양(犬羊)같이 취급했고, 미군을 해적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보빙사가 귀국 후 고종에게 복명한 기록을 보면 대미관의 극적인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여러 나라를 두루 구경하던 중 어느 나라가 가장 좋던가.”(고종)
“서양의 모든 나라가 프랑스 수도 파리가 제일 좋다고 하나, 신이 보건대 파리는 번화하지 않은 것은 아니로되 그 웅성함이 뉴욕만 못한 것 같습니다.”(전권대신 민영익)
“그 나라 미국의 사치하고 화려함은 일본과 비교해서 어떻던가.”(고종)
“미국은 토지가 비옥하고 자연자원이 광대하여 일본은 이에 미칠 바 못 됩니다. 일본이 서양법(근대화)을 모방했다고 하나 아직 일천하며, 진실로 미국에 견주어 논할 수 없습니다.”(부대신 홍영식)
그러나 귀국 후 정사 민영익과 부사 홍영식의 길은 갈라졌다. 민씨 척족세력의 거두였던 민영익은 청에 의존하는 ‘부청주의’를 내세웠고, 홍영식은 미국의 정치제도를 본받아 조국 근대화를 이루고자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나섰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임진왜란 전 일본에 다녀온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예처럼 ‘견외사절의 귀국 후 대립’은 역사 속에 되풀이되는 것 같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