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인문학의 위기]“취업과 너무 먼 文·史·哲” 폐과 잇따라

입력 | 2006-09-20 03:00:00


《최근 대학 구조조정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더욱 위기에 몰린 분야가 바로 인문·사회학이다. 대학에 시장논리가 팽배해져 문학 사학 철학 등 이른바 문사철(文史哲) 학과들은 취업률이 낮거나 가시적인 성과가 적다는 등의 이유로 폐과 대상 1순위가 된 것이다. 지난해 전국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을 보면 공학계열 71.7%, 자연계열 69.2%, 사회계열 55.8%, 인문계열 53.4% 등 계열별로 큰 차이가 난다.》

▽비인기 학과 폐과 속출=경원대가 2003년에 철학과를 없애는 등 최근 3년간 철학과 12개가 폐과됐고 독문과와 불문과도 각각 4곳이 문을 닫았다. 경북대는 5월경 독문과와 불문과를 사범대에 통합하려다 교수들의 반발로 계획을 일단 접었다.

90년 전통의 대구가톨릭대는 인문대 철학과를 비롯해 외국어대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 이탈리아어과 등 문과 분야 주요 학과에 대해 내년부터 학생 모집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현재 1학년이 졸업하는 4년 뒤에 이들 학과는 폐과된다.

1982년 개설된 철학과의 경우 모집정원을 50명에서 40명으로 줄였지만 입학생은 갈수록 줄어 현재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독문과도 사정은 비슷하다.

부산지역 대학들이 최근 2학기수시 학생을 모집한 결과 인문학 분야의 지원자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외대의 경우 영어학과는 1.2 대 1, 중국어학과는 미달됐으며 동의대는 인문학부 중 2 대 1을 넘는 학과가 드물었다.

경남대는 지난해부터 국제언어문화학부 4개 학과 가운데 중국어를 제외한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과 등 3개 학과의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고 이들 학과 소속 교수들은 일단 유사 전공으로 전보시키는 고육책을 내놓았다.

취업이 어려운 인문계열 및 야간학과의 통폐합 과정에서 실직을 우려한 교수들의 반발도 있었으나 고용 안정을 약속하고 협조를 유도했다. 이 대학은 과거 시간강사가 담당하던 상당수 강의를 정규 교수에게 맡기면서 시간강사가 일자리를 잃었다.

▽전공보다 취업이 우선=인문학의 위기는 전국적이지만 위기의 정도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서울 소재 대학들이 이제 인문학의 위기를 체감하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면 지방대는 이미 무너지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대로라면 지방대의 현주소는 서울 소재 대학의 가까운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학입시 면접 때 수험생들에게 “왜 인문학 관련 학과에 지원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학생은 “교직에 진출하기 위해” 또는 “공무원으로 취직하기 위해”라고 대답한다.

전남대 사학과의 경우 4학년생 36명 가운데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은 5명,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려는 경우는 4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학생들은 취직 시험에 인생을 걸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가하게 철학을 논하고 역사를 고민하는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대학과 교수들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학생 없는 대학원=학부의 빈곤은 대학원으로 가면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대학원생이 아예 없는 학교도 적지 않아 교수들은 학문의 맥이 끊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1학기 강원대는 독문과와 불문과 대학원생이 전무했다. 정교수 6명에 대학원생이 1명뿐인 모 대학의 불문과 교수는 “가르칠 학생이 없는데 어떻게 학문을 이어 가겠느냐”며 “학부생들을 붙잡고 대학원에 오라고 사정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취업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조선대의 한 교수는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고교 때부터 취업을 지상 목표로 정하고 대학에 들어온 마당에 순수학문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인지 자문해 보게 된다”고 털어놨다.

모든 학생이 학자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거의 모든 대학의 커리큘럼이 학자 양성 코스로 되어 있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원어민과의 자유토론식 면접시험을 보는 마당에 정규 대학교육만으로는 그 틀에 맞추기 어렵다는 것.

전남대 최정기(사회학) 교수는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소위 순수학문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강의실에서는 시험문제 풀이식 강의가 될 수밖에 없고, 논문의 소재 또한 현실과 접목되는 분야의 정책 대안 위주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수년 전 하버드대 총장이 신년사를 통해 ‘기술의 진보가 빨라질수록 학문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며 “결국 인문학이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그릇이 된다는 생각을 사회적으로 공유하지 않는다면 대안이 없다”고 지적했다.

▽인문학 지원 절실=학문은 기초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이 균형을 이뤄 발전해야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고사 위기에 놓인 인문학에 대한 인식 전환과 정부의 과감한 지원이 절실하다고 학계는 촉구한다.

그러나 정부의 연구개발(R&D)비 중 인문학 연구지원비를 보면 △2003년 6조5000억 원 중 480억 원(0.74%) △2004년 6조9000억 원 중 590억 원(0.86%) △2005년 7조7000억 원 중 556억 원(0.72%) 등으로 열악한 수준이다.

교수들은 인기 분야는 사립대에 넘기고 국립대는 사립대가 꺼리는 기초·순수학문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등으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공립인문대학장협의회 윤평현(전남대 교수) 회장은 “학부제와 신자유주의 등으로 인문학 위기가 가속화됐다”면서 “학부제를 없애 학생들이 원하는 전공에 깊이 빠져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북대 김영기 인문대학장은 “프랑스처럼 인문학을 집중 육성하는 정책연구소를 만들거나 국공립대만이라도 인문학 육성책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자들이 스스로 부르고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남대 최재목(철학) 교수는 “자연과학과 첨단기술 분야와 인문학을 연계시켜 현실 문제에 접근하는 노력을 보여 주는 게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광주=김권 기자 goqud@donga.com

대구=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박사 학위는 해외서”

세계화 물결로 우수인재 눈뜨고 뺏겨▼

인문학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는 학문의 식민지화다.

1980년대 한국 지식사회는 학문의 토종화를 주창하고 나섰지만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인문·사회학계가 내세울 만한 보편적 이론의 등장은 여전히 요원하다. 여기에 학문 영역에도 세계화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강의가 아니면 우수한 국내 인재를 해외 교수들에게 모두 뺏기는 형편이다. 이에 따라 국내 대학은 학사만 양산한 채 석박사 과정은 아예 해외 대학에 위탁하다시피 하면서 학문적 종속성이 더욱 심화됐다.

이는 주요 대학 인문·사회과학 전공 교수의 국내 박사 비율이 1980년 이후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을 통해 1980년부터 2005년까지 5년 단위로 전국 대학 전임강사 이상 교원들의 국내외 박사학위 비율을 추적한 결과 해외 박사 비율은 25.0%에서 35.5%로 10.5%포인트가 늘었다. 기초 학문이라 할 인문학 전공자의 경우 해외 박사 비율은 1980년 이전 25.1%에서 2001∼2005년 48.0%로 22.9%포인트나 증가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명문대 대학원들도 본교 출신의 일급 인재들을 해외로 뺏긴 채 하위권 대학에서 충원하거나 중국과 동남아에서 돈을 주고 연구원들을 데려오는 형편이다.

이는 일본 도쿄(東京)대 교수들 중 90%가량이 국내 박사인 점과 대조를 이룬다. 도쿄대 출신인 양일모(동양철학) 한림대 교수는 “일본에서는 박사과정 2년차 정도에 해외로 나가 언어 연수와 학위 과정을 거치도록 하지만 논문은 국내에서 발표하는 것만 인정하는 학풍이 정착돼 있다”며 “이는 일본 학계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자부심의 발로”라고 설명했다.

한국 인문학계가 자생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결과를 생산하고, 이를 교육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의 복구가 가장 중요하다. 또 석박사 과정을 포함해 학문에 뜻을 둔 학생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백종천(서양철학) 서울대 교수는 “한국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학문에 전념할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지만 외국에 나가면 5∼6년간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에 내공의 차이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바로잡습니다▼

△ 9월 20일자 A6면 ‘인문학 위기’의 내용 중 부산외국어대의 사례는 2006년 수시 2회 전일제(야간)의 경우이며 주간 영어학과는 6.71 대 1, 중국어학과는 6.5 대 1입니다. 부산외국어대는 야간학부를 전일제 수업이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