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때.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마른 깜둥이’라고 놀렸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데다 깡 말랐기 때문. 그래도 남자 친구들이 놀리는 건 참을 수 있었다.
“어∼. 나보다 팔목이 얇네. 다리도…”라는 여자 짝꿍의 얘기를 듣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싫었다.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창피함을 잊기 위해서.
9년 뒤 무대는 캐나다 토론토의 모나코 파코 칼리지에이트 고등학교 농구장.
이번엔 한 팀으로 뛰는 같은 반 백인들이 문제였다. 비쩍 마른 동양인을 우습게 보고 패스를 아예 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뒤 결투를 청했다.
방과 후 10여 명의 덩치 큰 백인 패거리와 마주했다. 무섭고 다리가 떨렸다. 하지만 윗니로 입술을 꽉 물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이때 같은 반의 흑인 동급생들이 갑자기 나타나 “왜 인종차별 하느냐”며 편을 들어줬다. 원수처럼 느꼈던 검은 피부가 처음으로 고마웠다.
○ 보디빌딩 챔피언이 되다
다시 9년이 지났다. 무대는 여전히 캐나다 토론토. ‘2004년 머슬 마니아(보디빌딩) 캐나다’ 대회의 신인 부문에 나선 22명의 출전 선수 대부분은 백인이었다. 동양인은 혼자였다. 1차로 10명을 선발하는 ‘톱 10’에 이어 2차 ‘톱 5’에도 뽑혔다. 처음에는 대회 출전 자체가 목표였다. 하지만 예선을 차례로 통과하면서 절로 욕심이 났다. 흑인 가수 퍼브 대디의 ‘아이 니드 어 걸(I need a girl·나도 여자 친구가 필요해)’이란 힙합 음악에 맞춰 브레이크 댄스를 추듯 3분 동안 연기를 펼쳤다. 마지막으로 흑인과 둘이 남았다.
마이크를 통해 ‘Seoul Korea Sean Lee(서울 코리아 숀 리)∼’란 소리가 들렸다. 꿈만 같았다. 우승한 것이다. 어릴 때 친구들의 놀림으로 받은 상처를 달래기 위해 배웠던 춤이 큰 도움이 됐다. 순간 하얀 피부의 초등학교 여자 친구들이 떠올랐다.
○ 한국 최초 PTA 프로 개인트레이너
백인 친구들과의 싸움은 숀 리(28·flexxlee@hotmail.net)를 본격적인 ‘워크아웃(Workout·몸만들기)’에 빠져들게 했다. 방과 후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집에서는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아령을 했다. 팔이나 가슴처럼 남에게 보이는 부분에 집중했다. 구릿빛 피부와 탄력 있는 몸이 목표였다. 플렉스, 머슬 맥 등 보디빌딩 관련 잡지를 닥치는 대로 봤다.
하지만 독학에는 한계가 있었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불안했지만 개인 트레이너 지도는 받을 수 없었다. 돈이 없었다. 2003년 8월 전직 캐나다 보디빌더인 크리스란 스승을 만났다. 신진대사가 빠른 덕택에 웬만한 사람들은 12∼16주 걸린다는 근육 만들기를 8주 만에 해냈다.
다음해 캐나다에서 한인 최초로 보디빌딩 대회에 나가 신인상을 탄 데 이어 토론토에서 열린 피트니스 모델 선발대회에서 100명 중 12등을 했다. ‘톱 15’에 든 것이다. 캐나다 현역 모델을 가르쳐 부수입도 생겼다.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최고의 프로 개인 트레이너가 되고 싶었다. 피트니스 모델과 보디빌더, 개인 트레이너를 양성하는 미국 PTA(www.propta.com)에 도전했다. 올 5월 마침내 꿈은 이루어졌다. 6월에는 한국을 총괄하는 자격까지 얻었다.
○ 부모님과 피앙세
부모의 물심양면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숀 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내과병원 원장인 아버지는 하나 뿐인 아들이 대를 이어 의사가 되길 고집하지 않았다. 약사인 어머니는 근육 발달에 좋다는 약은 모두 챙겨주었다.
부모가 고교 1학년 때 과감히 캐나다로 유학 보내지 않았다면 PTA 한국 책임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했다면 PTA 프로 개인트레이너 자격증을 따지 못했거나 몇 년 더 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8년 전 만난 여자 친구 강세라(27) 씨는 숀 리의 워크아웃 일등공신. 캐나다 유학시절부터 지금까지 매일 밤 지브락 8개에 닭 가슴살, 고구마, 생선, 브로콜리, 쇠고기, 야채 등을 요리해서 나눠 담아 다음날 아침에 주었다. 본격적인 워크아웃에 돌입하면서 신경이 예민해진 숀 리의 투정을 받아주는 역할도 했다. 24일이면 여자친구에서 아내가 된다.
○ ‘워크아웃’은 이렇게
몸짱 만들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먹고 잘 자는 것. 배가 고프면 근육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2시간 반∼3시간마다 계속 먹어야 한다.
수면시간은 8시간이 가장 좋고 적어도 7시간은 자야 한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신진대사가 느려진다. 특히 남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이 불규칙하게 분비돼 근육 성장을 방해하고 지방 분해도 잘 되지 않는다.
맥주를 자주 많이 마시는 것도 좋지 않다. 여성호르몬(에스트로겐) 분비가 활발해져 근육이 잘 만들어지지 않고 살도 빠지지 않는다. 또 수분이 많아져 몸이 붓는다.
하루 1시간 이상 근육운동을 하면 안 된다. 한번 운동하면 최소 48시간 근육을 쉬게 한다. 쉬는 동안에도 근육은 만들어진다.
이호갑 기자 gdt@donga.com
PTA란
개인 트레이닝 협회(PTA·Private Training Association)는 미국 할리우드 스타와 프로농구(NBA) 미식축구(NFL) 프로야구(MLB) 선수 등을 개인 지도하는 트레이너들의 단체. 미스터USA 출신인 조 앤터리(46) 회장이 1980년에 만들었다.
이 협회의 자격증은 개인을 몸짱으로 만들어 주는 프로 트레이너임을 보증하는 신분증이다.
자격증을 따려면 머슬 마니아 캐나다, 미스터 올림피아, 토론토 프로 등 국제보디빌딩협회가 인정하는 세계 규모의 보디빌딩 대회에서 우승해야 한다. 물론 스테로이드를 복용하지 않아야 한다.
또 협회가 주관하는 영양학 필기시험과 실기시험, 인터뷰를 통과해야 한다. 인터뷰와 시험은 모두 영어로 진행된다. 숀 리는 한국어로 볼 수 있는 시험을 도입할 계획이다.
PTA는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12개국에 디렉터를 뒀다. PTA가 본사라면 디렉터는 지사에 해당한다. 각국의 디렉터는 프로 트레이너를 양성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숀 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