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땀을 닦고 포수의 사인을 읽는다. 입술을 오므리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와인드업. 시끄럽던 관중석이 잠잠해진다. 특유의 하이키킹으로 힘차게 뿌린 공. 방망이가 헛돈다. 5회부터 여섯 타자 연속 삼진 쇼.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2000년 9월 2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다저스타디움.
LA 다저스 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경기의 주인공은 검은 눈동자의 동양인이었다. 피안타 2개로 8회까지 무실점.
박찬호가 노모 히데오의 메이저리그(ML) 동양인 최다승(16승) 기록을 깨고 17승을 달성했다.
1994년 박찬호가 다저스에 입단할 때만 해도 국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강속구는 일품이라지만 당시 국가대표 에이스인 임선동, 조성민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다. 첫해 2경기 만에 마이너리그로 내려가자 “스카우트의 실수”라는 등 억측이 난무했다.
세간의 관심이 줄어든 마이너리그 생활은 약이 됐다. 절치부심. 1996년 ML로 복귀해 5승을 따내며 가능성을 보였다. 이후 5시즌(1997∼2001) 연속 10승 이상. 최고의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 후보에도 올랐다. 2002시즌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6500만 달러에 계약하며 특급투수로 대우받는다.
1990년대 후반 박찬호는 외환위기로 상처 입은 한국인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영웅이었다. 그가 던진 공은 무너진 경제에 자신감을 잃은 이들의 체증을 후련하게 뚫어 줬다. 웬만한 여자 허리보다 굵은 26인치의 허벅지가 화제였고, 야구는 몰라도 너무 빨라 솟구친다는 ‘라이징 패스트볼’은 알았다.
혹독한 시련도 겪었다. 텍사스로 옮긴 뒤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부진에 빠졌다. 현지는 물론 국내 팬들도 실망을 드러냈다. “끝났다”는 악담이 쏟아졌다. 지난해 12승으로 부활하나 싶더니 올해엔 장출혈이란 악재까지 만났다.
박찬호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그는 통산 106승을 올렸다. 137년 메이저리그 역사상 100승 이상 투수는 7%뿐이다. 동양인 최다승(18승) 기록이 올해 왕젠민(뉴욕 양키스)에게 깨진다 해도 박찬호는 영원한 ‘코리안 특급’이다.
1994년 4월 첫 등판에서 모자를 벗고 인사했던 스물한 살의 청년은 이제 한 아이의 아빠가 됐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 열린다는 소식에 부상에 대한 걱정을 접고 선뜻 조국의 부름에 응했던 그다. 복귀 소식이 들리는 코리안 특급에게 관심과 애정을 돌려줄 때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