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대법원장의 검찰, 변호사단체 비판 발언으로 시작된 법조계의 파문이 수뇌부의 진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선에서는 확대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사법부, 검찰, 변호사협회 수장이 25일 카메라에 잡혔다. 왼쪽부터 취임 1주년을 맞은 이날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청사로 출근하는 이 대법원장,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서초동 검찰청사 식당으로 걸어가는 정상명 검찰총장,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상임이사회를 주재하고 있는 천기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강병기 기자·연합뉴스
《이용훈 대법원장의 발언 파문을 계기로 ‘법조 3륜’으로 불리는 법원, 검찰, 변호사단체 간 기존의 동업자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대법원장의 발언 때문에 촉발된 것은 아니다. 사법연수생 1000명 배출 시대를 맞아 양적으로 급성장한 법조계에 이제는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신호탄의 성격이 강하다. 지각변동을 맞고 있는 사법체계 전반의 현실과 문제점을 집중 조명해 본다.》
25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형사법정.
법조비리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조관행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재판에서 법조브로커 김홍수 씨가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은 것을 놓고 검찰과 변호인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공방을 벌였다.
“피고인이 고법 부장판사까지 지냈기 때문에 김 씨가 증인으로 나와 진술하는 것이 자신의 항소심 재판 결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 것 같다.”(검찰)
“김 씨가 핵심 증인인데 중요한 증인을 가장 먼저 신문하는 것은 당연하다. 구인을 해서라도 출석시켜야 한다.”(변호인)
“검찰의 증거목록이 총 2907쪽이라고 돼 있는데 변호인 측이 검찰 기록을 열람해 복사한 것에는 무려 579쪽이 누락돼 있다. 검찰이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는 뺀 뒤 재판부에 제출한 것 아니냐.”(변호인)
“증거분리제출 제도에 따라 수사기록과 증거제출기록을 분리해서 만들기 때문에 수사기록 중 공소사실 입증에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증거로 제출한다.”(검찰)
이용훈 대법원장이 최근 직설적 화법으로 강조한 공판중심주의는 이미 법정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피고인의 범죄혐의를 입증하려는 검찰이 피고인을 기소할 때 공소장만 내고 그 외의 수사기록은 재판이 시작된 후 필요할 때 내는 ‘증거분리제출’ 제도로 대응에 나서면서 법원과 검찰은 공판중심주의 도입에 따른 홍역을 치르고 있다.
공판중심주의는 법정진술 위주로 재판을 진행하는 것이어서 검찰은 물론 변호인, 재판부 모두 진실을 찾기 위해 ‘물러설 수 없는 정면승부’를 벌여야 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의 관행은 이제 그만”=이 대법원장은 최근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면서 검찰과 변호사단체를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판사들에게도 혹독한 채찍을 가했다.
“국민은 사법부가 완전히 썩었다고 보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또 판사들이 서류에 주로 의존해 재판한다고 비판하면서 “그럴 거면 법복 입고 수고스럽게 법정에는 왜 들어가서 재판하느냐”고 질책했다. 법원을 포함해 검찰과 변호사단체 모두를 한꺼번에 비판한 것이다.
이 대법원장은 공판중심주의야말로 판사와 검사들이 서면과 기록에 의존해 서로 편하게 지내왔던 관행을 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했다.
▽공판중심주의는 피고인 인권보장의 수단=공판중심주의의 목적은 피고인들이 말을 하도록 해 주겠다는 데 있다. 검사의 신문에 ‘예’ 또는 ‘아니요’라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이 자기주장을 충분히 펼칠 수 있도록 보장하고 피고인 측의 증인 신청을 폭넓게 수용한다는 것이다.
2003년 공판중심주의가 시범 실시된 이후 2002년 0.73%이던 무죄율은 2003년 1.07%로, 2004년에는 1.12%로 늘었다. 2004년 12월에는 검찰이 작성한 피의자 신문 조서 내용에 대해 피의자가 “내가 진술한 대로 작성되지 않았다”고 부인하면 이는 증거능력이 없다는 대법원 판례까지 나왔다.
이에 검찰도 올해 4월부터 전국 18개 지검 본청에서 공판중심주의 기본 절차인 증거분리제출 제도를 시행해 왔다. 당시에는 전국의 모든 검찰청에서 실시된 것이 아니었다.
이 대법원장이 공판중심주의를 화두로 던지면서 검찰이 이 제도의 시행에 소극적인 것으로 비치자 대검은 25일 “공판중심주의를 적극 추진하겠다”며 이 제도를 전국 55개 모든 지검과 지청에서 시행한다고 밝혔다.
▽방향은 옳지만 제도 보완 시급하다=법원과 검찰은 공판중심주의가 형사재판의 대세라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고 보고 있다.
먼저 검찰이나 법정에서 위증을 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현실을 고려할 때 위증을 엄하게 처벌하는 장치를 마련하지 않고 법정진술에 대한 의존도만 높일 경우 ‘실체적 진실을 밝혀 범죄를 단죄한다’는 형사사법의 정의가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검찰이 기소한 위증사범은 2003년 587명에서 2005년 1057명으로 급증했다.
검찰은 공판중심주의가 정착된 미국처럼 검찰에서 허위 진술을 하면 ‘사법방해죄’로 처벌하고, 피의자의 수사 협조 여부에 따라 검사가 형량을 조정해 주는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재판의 효율성도 공판중심주의가 풀어야 할 숙제. 사건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재판기간이 길어진다. 현재 2000여 명의 법관과 1500여 명의 검사로는 한계가 있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공판중심주의를 제대로 실현하려면 판사가 2만 명쯤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와 있다.
증거분리제출 제도 시행 이후 피의자가 기소된 후 첫 재판이 열리기 전에는 검찰이 수사기록을 법원에 제출하지 않는 것을 두고 변호인들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 어렵다며 애로를 호소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법원은 물론 검찰도 공판중심주의를 실천할 준비가 돼 있지 않는 데다, 미국식 제도인 공판중심주의가 한국 사법 시스템에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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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 공판중심주의 확대되면 변호사 업계는
법원이 형사재판에서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하고 민사, 행정소송에서 구술변론 제도를 본격 실시하면 변호사 업계도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그동안 기록과 서면 중심의 재판이 이뤄지면서 변호사들은 서면 답변 자료를 작성하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판검사 출신의 일부 전관(前官) 변호사들은 사무장이 작성해 준 서면을 제출하고 재판부와의 ‘안면’을 내세워 사건을 해결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건 내용도 모르는 동료 변호사를 다시 대리인으로 선임해 법정에 출석시키는 이른바 ‘복대리’도 가능했다.
또한 ‘잘나가는’ 전관 변호사의 경우 한꺼번에 수십 건의 사건을 수임하는 일도 기록과 서면 중심 재판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
그러나 앞으로 이 같은 일은 대다수 변호사에게 꿈같은 일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공판 횟수가 크게 늘어나는 데다 사건 내용을 훤히 꿰고 있지 못하면 사건을 맡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수사기록에 의존할 때는 공판이 서너 차례면 끝났다”며 “하지만 이젠 중요 사건은 1주일에도 2차례 공판이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공판 준비 시간도 엄청나게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정에서 검찰이나 상대방 대리인과 치열한 공방을 벌여야 하고 재판부의 예기치 못한 질문에도 답변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
법조계 일각에선 “공판중심주의와 구술변론이 본격화되면 전관 예우 관행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아무리 검찰이나 법원 고위직을 지냈더라도 법정에 직접 출석해 공개적으로 공방을 해야 하기 때문에 변호사 간 우열이 뚜렷해진다는 것.
따라서 이 같은 변화에 체계적으로 대비해 온 일부 대형 로펌과 기존의 대다수 개인 변호사 간 양극화가 심해질 가능성도 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