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실 출입 막아라” 전자카드… 안내문…요즘 법원은 전관 변호사의 판사실 출입을 막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서울서부지법에는 지난해 12월부터 판사실마다 문 앞에 ‘판사 면담을 위해서는 별도의 절차를 밟으라’는 안내문을 써 붙여 놓았다(오른쪽). 층마다 판사실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자동출입통제 장치를 설치해 전자 칩이 장치된 별도의 인식카드가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다(왼쪽). 이종승 기자
《이용훈 대법원장이 강조하고 있는 공판중심주의와 구술변론은 ‘재판의 모든 것은 법정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판에 부적절한 영향을 끼치는 ‘전관예우’ 관행을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다. 전관예우 근절을 위한 법원의 노력과 한계, 남은 과제를 점검해 본다.》
“요새는 대부분 전관 변호사가 아니면 연고를 찾아 변호사를 선임한다. 여러분도 양심이 있으면 다 알 것이다. 여러분께 지금 가족들이 변호사 소개해 달라고 하면 법조인 명부를 찾아 (전관 변호사를) 소개해 주지 않나. 우리 자신이 여기에서 해방돼야 한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26일 서울고법과 서울중앙지법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 얘기다.
현직 대법원장이 ‘전관’이라는 표현을 직접 써 가며 전관예우 관행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적은 드물었다. 법원은 그동안 공식적으로 ‘변호사들의 부적절한 판사 접촉’이라는 표현을 써 왔고 전관예우라는 표현은 가급적 피해 왔다.
이 대법원장은 전국 법원 순시에서 법원 내의 부적절한 관행에 대한 판사들의 자기반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전관예우와 같은 부조리한 관행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현직 대법원장의 고백=최근 지방 순시에서 검찰 조사실에서의 조사를 ‘밀실조사’라고 말해 검찰의 반발을 불렀던 이 대법원장은 26일에는 판사의 집무실을 ‘밀실’이라고 지칭했다.
이 대법원장은 “(재판) 절차가 밀실 같은 판사실에서 사건 기록만 가지고 이뤄지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판사실에 접근해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브로커를 쓰고 전관 변호사를 선임해서 판사실에 가 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선 판사들은 한때 선배 또는 동료 판사였던 전관 변호사들이 판사실을 비공식적으로 찾아오는 등 그간의 경험담을 종종 털어놓곤 한다.
가장 전형적인 유형은 유사 사건 판결문을 놓고 가는 것으로 은근히 부담을 주는 방식. 서울지역의 한 판사는 “판사직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된 선배 변호사가 찾아와서 우리 재판부에 배당된 사건의 피고인 변호를 맡았다며 여러 건의 판결문을 두고 간다. 특별한 말도 없다. 들춰 보니 전부 유사한 사건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결문이었다”고 털어놨다.
한 부장판사는 “이런 경우는 아예 관행이 된 지 오래다. 그 판결문들을 읽어 보면 다른 사건과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재판 중인 사건의 양형을 다시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고법 부장판사 출신의 한 전관 변호사는 자신이 맡은 사건의 재판이 있는 날이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고법 형사부 판사실이 있는 법원청사 서관 16, 17층에 상주하다시피하며 이 방 저 방을 드나들고 있다.
▽법원청사 출입제한 조치, 단계적으로 확대=수원지법은 전관 변호사 출입 제한을 위해 가장 강력한 조치를 취한 곳으로 꼽힌다. 18일 판사운영위원회 의결로 변호사 등 외부인이 판사실에 출입하는 것을 예외 없이 금지하기로 했다. 다음 달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갈 예정.
부산고법·지법, 서울서부지법은 층마다 판사실로 들어서는 입구 쪽에 유리문 형태의 자동출입통제시스템(슬라이딩 도어)을 설치했다. 부산법원에는 23개의 슬라이딩 도어가, 서울서부지법은 판사실이 있는 8층과 9층에 모두 4개의 슬라이딩 도어가 설치됐다.
해당 법원에 근무하는 판사들도 전자칩이 장치된 신분증이 없으면 판사실 출입을 할 수 없다.
변호사를 비롯한 외부인은 청사 1층 경비실에서 방문을 희망하는 판사실과 방문 이유 등을 밝힌 뒤 전자칩이 내장된 방문증을 받아야 한다.
이 방문증을 이용하면 누가 언제 어느 층을 방문했는지가 모두 전자기록장치에 남게 된다. 이전처럼 전관 변호사들이 수시로 판사실을 드나들던 관행을 차단할 수 있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법원 측은 기대하고 있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올해 안에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법의 형사부 판사실이 있는 법원청사 서관에 자동출입통제시스템 설치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 내년에는 5개 고법 소재지 법원청사 모두에 이 시스템이 갖춰질 것”이라고 밝혔다.
▽부적절한 접촉, 완전히 차단될까=이런 설비가 효과는 있지만 서초동 법원청사처럼 규모가 크고 출입문이 여러 곳인 법원은 어느 장소에 얼마나 많은 출입제한시스템을 설치할지도 문제다.
더욱 실질적인 문제는 대부분 전관 변호사의 경우 ‘판사 시절 친분’ 때문에 이런 제한장치에도 불구하고 판사실 출입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것.
판사실 여직원들은 “법원에 있을 때 다 알던 분들이라 판사실 앞까지 찾아오면 ‘출입이 곤란하다’고 거절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선배 변호사가 인사라도 하겠다며 전화를 걸어 오면 정색하고 거절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서울중앙지법은 다음 달 1일 판사운영위원회를 열어 전관 변호사들의 판사실 출입 등에 관한 내규 개정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변호사 등 외부인의 출입을 전면 금지하기 어려운 만큼 전관 변호사들이 이곳저곳의 판사실을 자유롭게 오가는 것만이라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중”이라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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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중심’땐 검사출신 변호사 뜬다?▼
공판중심주의가 본격적으로 시행돼 법원이 형벌권 행사의 주도권을 좀 더 확실히 갖게 된다면 판사 출신 전관(前官) 변호사들의 인기가 더욱 높아질까.
법조계 안팎에서는 오히려 검사 출신 변호사가 유리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전관예우’ 관행의 무게중심이 판사 출신에서 검사 출신으로 옮겨가는 ‘풍선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
공판중심주의에서는 피고인의 진술권이 충분히 보장되므로 재판이 길어진다. 법정에서 유무죄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어떤 판결이 나올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아예 기소하기 이전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선 검사 출신 변호사가 낫다는 것이다.
‘상명하복’ 원칙을 명시했던 검찰청법 조항은 2004년 개정됐지만 규율과 명령체계에 익숙한 검사들에게 ‘선배 검사’의 무게는 여전하다. 올해 7월 전직 검찰 고위 간부가 제이유(JU)그룹 주수도 회장의 변론을 맡자, 수사팀 관계자는 “직접 찾아오거나 전화하지 않더라도 부담이 된다”고 토로했다.
검찰이 유죄 입증에 필요한 증거만 제출하는 ‘증거분리제출제도’가 확대되면 변호인이 의뢰인의 무죄 증거를 수집해야 하는 부담이 커진다. 이 역시 검사 출신이 유리해지는 대목이다.
한 중견검사는 “지금까지는 검찰이 피고인에게 유리한 진술 조서까지 대부분 법원에 제출했고 변호인이 이를 복사해 간 뒤 무죄의 단서를 골라내는 방식이었다”며 “앞으로는 변호인이 직접 무죄 증거를 조사해 재판부에 제출해야 하므로 의뢰인 입장에서는 수사 경험이 많은 변호인을 선호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한 판사 출신 전관 변호사를 선호하는 주된 이유가 법원에서 보석이나 집행유예 판결을 받아내 구속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었으나 구속 사건이 크게 줄면서 판사 출신 변호사들의 형사사건 수임 건수도 덩달아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1998년 13만8657건이던 구속영장 발부는 지난해 6만4057건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올 상반기에는 2만4841건에 불과하다.
반면 “재판이 길어지고 법정 다툼이 치열할수록 재판 경험이 많은 판사 출신 변호사가 유리하다”는 의견도 있다.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