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서울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본보 기자와 만난 패트릭 크로닌 국제전략연구소(IISS) 연구조사국장은 “한국의 여러 외교 관계자들이 미국과의 대북 협상에서 매우 사려 깊지 못한 태도를 보여 왔다”고 말했다. 정미경 기자
《“이렇게 평온할 수가….” 패트릭 크로닌 국제전략연구소(IISS) 연구조사국장이 26일 본보와의 단독 인터뷰 장소인 주한 미국대사관으로 들어서면서 던진 첫 마디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서울을 방문한 2002년 여름, 미대사관 주변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당시 시위대에 둘러싸여 ‘수난’을 당한 그는 이번에 아무런 저지 없이 가뿐하게 대사관에 입성한 것이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크로닌 국장은 “당시보다 한국의 반미 감정이 많이 수그러든 듯하다”는 조심스러운 평가를 내렸다. 영국 최고의 외교 싱크탱크로 평가받는 IISS에서 연구조사 업무를 총괄하는 그는 이번 방한 기간 국방연구원, 외교안보연구원의 외교 전문가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그는 “6자회담 거부,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이 계속돼 온 데 따라 한국 사회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며 나름대로 분석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 국민의 대미 인식에 변화가 있었던 반면 정부 당국자들은 미국과의 북핵 문제 조율에서 효율적인 외교관리 능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는 것이 크로닌 국장의 냉정한 평가다.
워싱턴의 대표적 한반도 전문가로 손꼽히는 그는 초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미 국제개발처(USAID) 행정관으로 근무하며 일방적 대북 원조의 문제점을 비판한 바 있다.
―한국 정부의 외교능력이 어떤 점에서 부족하다고 보시는지요.
“한국에는 몇몇 능력 있는 외교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외교 관리자는 미국과의 대북 협상에서 ‘매우 사려 깊지(deeply sensitive)’ 못한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물론 미국의 외교 관리들도 마찬가지고요.”
―한미관계가 삐걱거리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국 정부는 9·11테러 이후 미 외교정책의 근간이 바뀌었다는 점을 빨리 깨달아야 했습니다. 9·11테러 이전까지 미국은 탈냉전 외교에 치중했습니다. ‘세계화’ ‘아시아 유대 강화’ 등이 주요 이슈였죠.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 외교의 종착점은 ‘테러 척결’이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로 모아졌습니다. 따라서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처럼) 미국에 대북 금융제재의 수위를 낮추거나 해제해 달라고 아무리 요청해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부시 행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건가요.
“한미 지도부는 장기적 목표는 공유하지만 ‘어떻게 문제를 풀어 나갈 것인가’ 하는 전술적 차원에서는 긴장감이 팽팽합니다. 요즘 워싱턴의 기류는 6자회담에 대한 인내심을 잃어 가는 분위기입니다. 북한은 6자회담 기간에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시간 손실(loss of time)’ ‘비생산적 외교(unproductive diplomacy)’라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미국이 북한과 이란의 핵문제를 보는 관점은 어떻게 다른가요.
“이란보다 북한 핵사태를 더 다루기 어렵고 시간이 촉박한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이란은 핵무기 개발 단계에 있는 반면 북한은 이미 상당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 이란은 석유가 풍부하고 미국에 지정학적 중요성이 큰 나라입니다. 반면 북한은 훨씬 폐쇄된 사회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국제무대의 ‘이성적 참가자(rational actor)’라고 보기 힘듭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 능력을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IISS 분석에 따르면 11개의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봅니다. 보유 능력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북한의 핵 관련 노하우가 핵거래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올해 7월 미사일 발사 이후 북핵 협상에서 중국의 조정자 역할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데요.
“중국은 계속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중국도, 미국도 모두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북-중 관계에서 과거처럼 ‘자동적인 동맹(automatic alliance)’은 더는 기대하기 힘들게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크로닌 국장에게 “한미정상 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합의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common and comprehensive approach)’을 도출하는 것이 쉬울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구체화하는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군사 경제 정치적 해법이 종합적으로 담겨 있어야 하는데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보다는 ‘상징적 타협’의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그는 “포괄적 접근 방안이 양국 국민과 정부 관리들에게 ‘안심 효과’는 줄 수 있다”고 미묘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