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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67년 美마셜 첫 흑인 대법관 취임

입력 | 2006-10-02 03:02:00


1967년 10월 2일 미국 워싱턴의 연방 대법원. 말쑥한 차림의 한 흑인이 성경책 위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흑인의 아내와 두 아들은 숨을 죽였다. 대법관들도 그의 입을 주시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법을 집행할 것이며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공평하게 대하겠습니다.”

더굿 마셜은 이날 선서로 미국 최초의 흑인 대법관이 됐다. 흑인 노예의 후손이 최고 법원의 판사가 됐다는 뉴스는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당시 뉴욕타임스 1면의 기사.

“린든 존슨 대통령이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법관이 된 더굿 마셜의 선서를 지켜보기 위해 대법원을 방문했다.”

마셜이 대법관까지 오르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철옹성 같은 백인우월주의의 사법부에서 흑인 마셜은 곳곳에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시련은 로스쿨 입학 때부터 찾아왔다. 그는 메릴랜드대 로스쿨에 들어가길 원했으나 학교 측은 입학을 거부했다. 학교의 인종 분리 방침 때문.

하지만 이 사건은 ‘인권 변호사 마셜’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차선책으로 택한 하워드대를 졸업한 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의 고문 변호 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행동에 착수했다.

메릴랜드대 로스쿨로부터 자신과 같은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한 한 흑인 학생의 변호를 맡은 것. 메릴랜드주 법원은 “대학이 (입학생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판결해 마셜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마셜은 인권 변호사로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대법원까지 갔던 32건의 소송 중 29건에서 이겼다.

존슨 대통령은 은퇴하는 톰 클라크 대법관의 후임으로 마셜을 지명하면서 “옳은 일을 적기에 하는 것이며,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마셜은 24년간 대법관으로 있으면서 인권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특히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음을 환기시켰으며 일관되게 사형 제도에 반대했다.

1991년 6월 그는 건강 문제를 이유로 사임한 뒤 1993년 초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미국변호사협회(ABA)는 인권 증진에 헌신한 마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2년 ‘더굿 마셜상(賞)’을 제정했다. 올해는 베테랑 인권 변호사이면서 교육자인 줄리어스 체임버스가 이 상을 받았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