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풍연가‘의 주요 촬영지인 우도는 소가 드러눕거나 머리를 내민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현재의 이름이 붙었다. 섬의 남동쪽 끝 쇠머리오름에 있는 우도등대. 사진 제공 제주특별자치도청
저수지를 둘러싼 단풍과 물 안에 밑둥의 반을 둔 왕버드나무, 새벽녘 안개가 어우러져 묘한 가을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인 주산지. 사진 제공 청송군청
《깊어가는 가을. 좋은 사람과 함께 훌쩍 단풍여행을 떠나고 싶다.
하지만 여행 책자에 단골로 소개되는 곳은 끌리지 않는다. 천편일률 행선지에서 벗어나 나만의, 혹은 우리만의 추억을 쌓고 싶기 때문이다.
올 가을엔 영화의 배경이 된 촬영지를 찾아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보면 어떨까.
촬영지에는 멋들어진 장면 한 컷을 위해 전국 구석구석을 찾아 헤맨 스태프의 발품과 노고가 녹아있다.
관객의 마음을 울린 애틋한 사랑과 이별의 사연에 젖을 수도 있다.》
‘서편제’ ‘취화선’ 등을 찍은 50여 년 현장경력의 정일성 촬영감독은 “가을 촬영지는 아름다움과 쓸쓸함을 동시에 지녀야 하기 때문에 사계절 중 선정 작업이 가장 까다롭다”고 말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먼저 영화를 보면 감동은 두 배가 된다. 한국 영화의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며 가을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명소를 소개한다.
사랑
“혹시 왈츠 출 줄 알아요?”
석양을 뒤로 한 채 젊은 연인들이 수줍게 왈츠를 춘다. 이병헌이 “손이 차다”고 하자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은주는 “저 원래 손 차요. 마음이 뜨겁다 보니까”라고 답한다.
가을에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청춘이 유난히 많다. 남녀 모두 옆구리가 시린 계절,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한 단풍은 ‘작업’하기에 최고의 조건이다.
2001년 개봉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두 사람이 왈츠를 춘 곳은 충남 태안군 근흥면 갈음리 해수욕장의 소나무숲. 인적이 드문 비경이었지만 영화에 소개된 뒤 찾는 이가 부쩍 늘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백사장은 마음까지 깨끗하게 해 준다.
가을 분위기에 맞는 영화 속 명장면으로 설경구와 송윤아 주연의 2006년 작 ‘사랑을 놓치다’에 나온 동상저수지 주변을 빼놓을 수 없다. 동상저수지는 전북 완주군 위봉산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저수지로 영화 제작팀이 만든 가교가 운치를 더한다. 동상저수지와 대아저수지를 휘돌아 굽이굽이 돌아가는 호반도로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알려져 있다.
심은하 이성재 주연의 1998년 작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사랑을 확인한 주인공들이 손잡고 걸어가는 라스트 신은 경기 과천시 서울대공원의 천연림에서 촬영했다. 청계산의 천연림 속에 자리 잡은 7.38km의 숲길을 걷다 보면 가을날 달콤한 로맨스의 주인공은 당신이 될지도 모른다.
이별
이나영과 정재영 주연의 2004년 작 ‘아는 여자’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은 남자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아가씨와 만들어가는 로맨틱 코미디다.
첫 장면은 멋들어진 한 폭의 그림 같은 낙엽 숲에서 정재영이 옛 사랑과 헤어지는 내용. 한번쯤 걸어보고 싶어지는 이곳은 강원 춘천시 남이섬의 메타세쿼이아 숲길이다.
숲길의 진정한 운치를 맛보고 싶다면 26일 개봉하는 ‘가을로’를 찍은 전남 담양군의 가로수 길을 찾아가면 된다.
영화에서 다큐멘터리 프로듀서인 김지수가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걸어가는 장면은 29번 국도를 따라 광주에서 담양으로 향하다 보면 찾을 수 있는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촬영했다. 이 길은 담양읍을 거쳐 순창과 남원 방면 24번 국도로 이어지며 순창군 경계까지 약 8.5km 간 계속된다. 잎이 무성하고 나무 높이가 10m 이상 돼 절정일 때는 ‘금빛 터널’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준다.
‘가을로’에는 경북 포항시의 내연산도 등장한다. 계곡에서 폭포와 단풍을 감상하고, 정상에서는 푸른 동해바다와 붉은 단풍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영화 포스터의 촬영지인 안산 갈대습지공원도 제작진이 고심 끝에 발굴해 낸 가을 명소로 꼽힌다.
2003년 작 ‘국화꽃 향기’의 주 촬영지인 경남 통영시의 용초도도 빼어난 가을 풍경을 자랑한다. 장진영이 늦게 나타난 박해일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위해 찾았던 섬. 바다에 맞닿아 있는 작은 분교, 그리고 아이들의 장난으로 물에 빠진 장진영을 박해일이 구해낸 장면의 배경이 바로 용초도다. 이곳에서 잠시 눈을 감으면 영화 내내 흘렀던 가곡 ‘산타루치아’가 귓가에 맴돌 것이다.
1999년 작 ‘연풍연가’의 촬영지인 국내 최남단 마라도도 가볼 만한 영화여행 코스다. 제주도에서 관광가이드와 여행자로 만난 장동건과 고소영의 애틋한 감정이 시작되는 로맨틱한 공간인 마라도는 해안을 따라 도는 데 1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섬 가장자리의 가파른 절벽과 기암, 남대문이라 부르는 해식터널과 해식동굴이 마라도의 손꼽히는 관광지다.
인생
가을은 인생의 그윽한 향기가 묻어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인생의 모습을 다룬 2003년 작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울긋불긋한 단풍은 배신한 아내를 죽이려고 살기를 품은 청년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영화의 배경은 경북 청송군 주왕산의 저수지인 주산지. 조선 숙종 때 만든 285년 된 인공 저수지로 한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한다.
가을에는 저수지를 둘러싼 단풍과 밑둥의 반을 물에 담근 20여 그루의 왕버드나무가 감상 포인트. 특히 단풍과 왕버드나무, 물안개가 뒤섞이며 신비감을 자아내는 새벽녘은 주산지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 영화를 장식한 물 위의 암자는 아쉽게도 환경 보호를 위해 촬영 직후 철거됐다.
천진난만한 아홉 살 꼬마스님 도념과 사춘기 총각스님 정심, 그리고 큰스님이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동승’의 가을 풍경도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촬영지는 전남 순천시의 선암사. 조계산 기슭에 있는 이 절의 주변에는 수백 년 된 떡갈나무, 굴참나무, 단풍나무가 울창해 가을 단풍이 멋있기로 유명하다.
반대편인 서쪽의 산 중턱에 있는 송광사에서 선암사를 잇는 조계산 등산로도 단풍의 멋을 즐기기에 제격. 절 앞에 있는 아치형의 다리 승선교(보물 제400호)도 감상할만한 문화재다.
2006년 작 ‘국경의 남쪽’에서 새터민인 차승원이 남한에서 만난 연인 심혜진과 데이트를 하던 서울 한강둔치의 반포지구도 가을을 느끼게 해 준다. 단풍을 감상할 순 없지만 산책로 사이로 갈대가 우거져 가을 풀숲의 정취에 젖을 수 있다. 도심에서 가깝고 산책과 운동을 즐길 수 있다는 것도 매력.
대규모 갈대 군락지가 있는 광나루 지구, 수크령 강아지풀 물억새 등이 무성한 청계천 하류와 중랑천의 합류 지점도 연인과 함께 들러볼 만하다.
글=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사진=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