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도버 거리의 ‘도버스트리트 마켓’ 3층 매장. 고풍스러운 침대와 TV, 마네킹 다리가 독특하다. 사진 제공 김류경 씨
빈티지 편집매장 ‘스수아’. 마네킹에 걸쳐 놓은 1950년대 모피 코트가 눈에 띈다. 원대연 기자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의 ‘데님바’. 청바지 족이 좋아할 만한 구두와 액세서리 등을 모았다. 원대연 기자
티셔츠 자판기, 커다란 새장 속의 마네킹, 고풍스러운 침대….
영국 런던시내 도버 거리에 있는 점포 ‘도버스트리트 마켓’은 독특했다. 실험적인 일본 패션과 프랑스풍의 앤티크, 그리고 미국식 빈티지의 만남. 다른 것끼리 만날 때 느껴지는 특유의 에너지가 ‘마켓(시장)’의 의미를 깨닫게 했다.
도버스트리트 마켓은 일본 패션브랜드인 콤 데 가르송의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가 2004년에 개설한 편집매장. 랑방의 수석디자이너 알버 엘바즈에서 신인 디자이너까지 가와쿠보가 택한 수십 종의 디자이너 컬렉션이 6개 층에 걸쳐 진열돼 있다.
편집매장은 다양한 브랜드의 패션 상품을 한 곳에 모아 파는 유통 형태로 멀티 숍, 셀렉트 숍으로도 불린다. 특정 브랜드의 제품에 얽매이지 않고 운영자가 상품을 선별해 진열한다. 과거엔 단순히 인기 브랜드를 모아 소비자의 선택권을 늘리는 데 의미가 있었지만 점차 ‘편집’ 기능이 강조되면서 운영자의 안목에 따라 매장의 성패가 좌우되는 사례가 많아졌다.
가와쿠보 같은 세기의 디자이너가 골랐다는 이유로 소비자들은 믿고 제품을 산다. 파리의 유명 편집매장인 콜레트에서 많이 팔렸다는 소문이 돌면 무명 디자이너도 이곳저곳에서 러브 콜을 받는다.
국내에서도 빠르게 늘고 있는 편집매장은 패션 유통계의 지도를 바꾸어가고 있다.
# 1. 브랜드 백화점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편집매장 ‘쿤’의 이상재 사장은 한국 편집매장 역사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개념조차 생소하던 1999년에 문을 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선 브랜드 제품에 대한 수요가 눈에 띄게 늘고 있었다. 대학가에선 프라다 배낭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른바 ‘청담동 며느리 스타일’을 연출하려면 페라가모의 바라 구두가 필수였다.
이때부터 서울 동대문, 이태원, 청담동 등지에 명품 편집매장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당시 편집매장 바이어들은 해외 아웃렛 매장에서 프라다, 구찌 등 유명 브랜드의 이월상품을 사들인 뒤 국내에서 팔았다.
#2. 남다른 것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의 최신 제품을 조금씩 팔아봤어요. 통하더군요.” (이상재 사장)
소비자들은 남과 다른 것을 원했다. 해외여행과 인터넷을 통해 패션 선진국의 유행 정보도 빠르게 퍼졌다.
대기업들은 이런 변화에 주목했다. 가장 빨랐던 곳은 신세계 인터내셔널. 2000년 청담동에 ‘분더숍’을 내면서 수입브랜드 편집매장 붐을 일으켰다.
여성의류업체 한섬의 ‘무이’, 롯데백화점의 ‘엘리든’도 대표적인 수입브랜드 편집매장. 최근 청담동에 들어선 편집매장들도 대부분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해외 브랜드를 모아 파는 형식이다.
분더숍 바이어 반은환 팀장은 “단독 매장을 내는 데 위험 부담을 느낀 해외 브랜드들이 편집매장을 통해 시장 테스트를 해 보고 싶어 한다”면서 “시장이 커지면서 컬렉션에 참가하는 한국 바이어들의 위상도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3. 라이프스타일 숍
현대백화점의 청바지 바이어인 노희주 차장은 요즘 매우 바쁘다.
예전엔 리바이스, 게스 같은 청바지 브랜드 매장만 관리하면 됐다. 요즘은 다르다. 백화점마다 ‘다른 곳에 없는 것 갖추기’ 경쟁이 심하기 때문이다.
그는 청바지 편집매장 ‘데님바’를 ‘라이프스타일 숍’으로 꾸미기로 했다. 청바지 일변도에서 벗어나 액세서리에서 생활용품까지 단골 고객들이 살 만한 모든 제품을 모아 팔겠다는 것. 노 차장은 “청바지 마니아의 라이프스타일에 어울리는 레스토랑과 자동차 관련 정보도 함께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올 7월 청담동에 문을 연 빈티지(낡고 오래된 느낌의 스타일) 편집매장 ‘스수아’. 최혜정 디자인 실장은 1946년판 ‘보그’를 꺼내 보였다.
“파리 벼룩시장에서 찾아낸 거예요. 오래된 천으로 만든 코르셋과 1950년대 모피 코트도 있어요. 빈티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인 셈이죠.”
편집매장 ‘구’의 컨셉트는 ‘세련된 트렌디’다. 허수인 사장은 “○○브랜드 있느냐’고 묻던 소비자들이 점점 자신의 취향에 맞춰 개별 아이템을 찾는다”면서 “편집매장도 ‘○○브랜드 입고’ 시대를 넘어 컨셉트에 맞는 아이템을 파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4. 패션 미디어
할리우드의 영화 배급사들은 신작 영화를 선전할 때 뉴욕타임스 리뷰를 들먹인다. 패션도 마찬가지. 특정 디자이너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 홍보하려면 ‘코로소 코모(밀라노의 유명 편집매장)에서 인기’ ‘콜레트에 소개’라는 문구를 내걸면 된다.
국내 편집매장 바이어들의 소망도 ‘한국판 콜레트’를 만드는 것. 유행의 메카이자 신진 디자이너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고 싶다는 뜻이다. 유통망의 벽에 부닥쳐 좌절하는 신진 디자이너에게 편집매장은 훌륭한 데뷔무대가 될 수 있다.
쿤의 이 사장은 “셀렉터의 개성을 더 강하게 드러내고 싶다”며 “한국에도 뛰어난 안목을 자랑하는 강력한 편집매장이 곧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